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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시호님의 플래닛입니다.</title>
    <link>https://gykang2.tistory.com/</link>
    <description></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pubDate>Wed, 13 May 2026 20:14:1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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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nagingEditor>비너스매화</managing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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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스크랩] [선승혜의 그림에서 마음 읽기] 그림과 `밀당`하다보면, 마음 근육이 자란다</title>
      <link>https://gykang2.tistory.com/119</link>
      <description>&lt;!-BY_DAUM-&gt;&lt;dt style=&quot;line-height: 2;&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선승혜의 그림에서 마음 읽기] 그림과 '밀당'하다보면, 마음 근육이 자란다 &lt;/span&gt;&lt;dt style=&quot;line-height: 2;&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pan&gt;&lt;span class=&quot;location&quot;&gt;&lt;a href=&quot;https://otalk.kbstar.com/quics?page=C019391&quot;&gt;&lt;u&gt;&lt;font color=&quot;#0066cc&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선승혜의 그림에서 마음을 읽기 &lt;/span&gt;&lt;/font&gt;&lt;/u&gt;&lt;/a&gt;&lt;span class=&quot;blind&quot; style=&quot;width: 0px; font-size: 12pt; float: left;&quot;&gt;등록일&lt;/span&gt;&lt;em&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2014.07.17&lt;/span&gt;&lt;/em&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 &lt;/span&gt;&lt;/span&gt;&lt;span class=&quot;share&quot;&gt;&lt;span class=&quot;btn small whgdkdy&quot; jquery164006600902473045222=&quot;6&quot;&gt;&lt;button&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좋아요&lt;/span&gt;&lt;em&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6&lt;/span&gt;&lt;/em&gt;&lt;/button&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 &lt;/span&gt;&lt;/span&gt;&lt;span class=&quot;btn small dkfflrl&quot; jquery164006600902473045222=&quot;5&quot;&gt;&lt;button&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알리기&lt;/span&gt;&lt;/button&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 
&lt;/span&gt;&lt;/span&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
&lt;/span&gt;&lt;dd style=&quot;line-height: 2;&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
&lt;/span&gt;&lt;style type=&quot;text/css&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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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span&gt;&lt;!-- 본문 컨텐츠 star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
&lt;/span&gt;&lt;div class=&quot;box_rainbow&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
&lt;/span&gt;&lt;dl class=&quot;rainbow14&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
&lt;/span&gt;&lt;dt&gt;&lt;img width=&quot;352&quot; height=&quot;21&quot; alt=&quot;마음읽기&quot; src=&quot;https://oimg3.kbstar.com/bbs/22/918/ssh_0_2014_07.jpg&quot; border=&quot;0&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 
&lt;/span&gt;&lt;dd class=&quot;s2&quot; style=&quot;font-size: 14px;&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100세 시대에 사람들은 건강과 돈을 걱정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마음 단련도 
중요하다. 불행은 예고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때로는 사무치게 외로울 수 있다. 그때 단단한 마음은 인생의 고비를 버티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체력을 위해 운동을 하려면 일주일에 세 번은 해야 되는 것처럼, ‘마음 운동’도 일주일에 세 번은 해보자. 이 칼럼은 마음 운동을 위한 
그림 읽기, 그 중에서도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그림으로 내 마음 읽기를 담아보려 한다. &lt;/span&gt;&lt;/dd&gt;&lt;/dl&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
&lt;/span&gt;&lt;dd style=&quot;line-height: 2; font-size: 14px;&quot; align=&quot;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
&lt;/span&gt;&lt;div align=&quot;lef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사람의 오감 중에서는 ‘시각’의 영향력이 가장 강하다. 요즘 우리들은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많이 이용하게 되면서 
텍스트가 아닌 이미지로 생각하게 되었다. 바로 이미지의 전성 시대이다. 이런 이미지 시대에 맞게 그림으로 정서관리를 하면 어떨까?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그림은 
어른들의 마음에 주는 영양제이다. 그림을 감상하는 나 스스로 마음이 부드러워지는 마음의 영양보충이다. 어른에게 그림 감상은 어린이에게 그림책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과 같은 효과를 거둔다. 또한 그림은 지성과 감성이 흥미로운 탐험을 하게 하면서, 다른 이에게 공감하는 능력을 
키우기도 한다. 그림 속에 나타난 다각적인 감정들과 밀고 당기다 보면 어느새 마음의 근육이 마련되어 있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마음을 읽는 정서의 밀고 
당김은 사람과 사람 간의 ‘거리유지’와 닮았다. ‘거리유지 공감법’이다. 몰두라기보다 차가운 애정과 뜨거운 무관심이다. 너는 너, 나는 
나이지만,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림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비판의 오만을 내려놓자. 내가 보는 그림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인정하자. &lt;/span&gt;&lt;font color=&quot;#9e4c30&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그림을 인정하는 순간, 그림 속의 감정들과 내 감정의 기운이 운율을 이루며 생동감 있게 꿈틀댄다. 
&lt;/span&gt;&lt;/fon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바로 기운생동이다. 그림으로 내 기분이 밝아지고, 분노는 누그러지며, 슬픔은 위로 받고, 즐거움은 공유하게 된다. 혼자서 감정조절이 
잘 안되던 사람도 그림을 보면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이제 그림 속에 숨겨져 있는 마음의 코드를 읽어보자. 모든 독서가 오독이라고 하듯이, 모든 
그림감상이 오해여도 좋다. 내가 너를 인정하는 순간, 너는 나의 그림이 되기 때문이다. &lt;/span&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
&lt;/span&gt;&lt;dd style=&quot;line-height: 2; font-size: 14px;&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
&lt;/span&gt;&lt;div align=&quot;center&quot;&gt;&lt;br&gt;&lt;img width=&quot;275&quot; height=&quot;315&quot; alt=&quot;&lt;청송정(聽松堂)&gt; 조선 중기의 큰 선비 청송 성수침의 독서당&quot; src=&quot;https://oimg3.kbstar.com/bbs/22/918/ssh_1_2014_07.jpg&quot; border=&quot;0&quot;&gt;&lt;br&gt;&lt;fon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lt;청송정(聽松堂)&amp;gt; 조선 중기의 큰 선비 청송 성수침의 
독서당&lt;/span&gt;&lt;/fon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 &lt;/span&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
&lt;/span&gt;&lt;p&gt;&lt;br&gt;&lt;/p&gt;&lt;/dd&gt;&lt;p style=&quot;line-height: 2;&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
&lt;/span&gt;&lt;/p&gt;&lt;dt style=&quot;line-height: 2; font-size: 14px; font-weight: bold;&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즐거운 친구는 왜 멀리서 올까? 
&lt;/span&gt;&lt;dd style=&quot;line-height: 2; font-size: 14px;&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동아시아에서 천여 년간 교과서로 읽어온 &amp;lt;논어&amp;gt;의 첫 장은 세가지 감정으로 
시작한다. 기쁨, 즐거움, 섭섭함이다. ‘기쁨(說/悅)’은 배울 때, ‘즐거움(樂)’은 친구를 만날 때, ‘섭섭함(溫)’은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때 느낀다. &amp;lt;논어&amp;gt;에서 “친구가 멀리서 오면, 또 기쁘지 않은가 (有朋自遠方來 不亦樂乎)”라고 공자는 삶의 즐거움을 친구를 
만날 때 느끼는 감정으로 설명했다. 특히 멀리서 온 친구에 대한 반가움은 먼 길도 마다 않고 나를 만나러 오는 친구에 대한 고마움이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만나면 즐거운 친구는 왜 멀리서 오는 것일까? &lt;/span&gt;&lt;font color=&quot;#9e4c30&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친구와의 관계는 너무 가깝지도 않게 너무 멀지도 않게 
‘거리유지 공감’이 중요하다는 지혜다.&lt;/span&gt;&lt;/fon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 우정의 즐거움은 ‘거리유지 공감’에서 나온다. &amp;lt;논어&amp;gt;에서 즐거움에 대한 또 다른 
문구를 인용하면, “아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이 낫고, 좋아하는 것보다 즐기는 것이 낫다 (知之者 不如好之者 好之者 不如樂之者)”라고 한다. 
친구들 사이에 알고 지내는 사이, 좋아하는 사이, 즐겁게 지내는 사이 중에서, 즐겁게 지내는 것이 최고이다. 알기만 하면 차가운 관계에 머물고, 
좋아하게 되면 그만큼 애증의 관계가 되고, 즐겁게 지내면 적당한 거리와 적당한 공감이 있다는 것이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동아시아의 그림에는 친구들을 만나는 
그림이 많다. 친구들과 만나는 그림은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그림을 잘 들여다 보면, 그림 속의 친구들이 서재에 함께 앉아서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산책을 하기도 하며, 차를 마시기도 한다. 멀리 유배지에 가 있어도 친구가 있어 외롭지 않다. &lt;/span&gt;&lt;br&gt;&lt;br&gt;&lt;/dd&gt;&lt;p style=&quot;line-height: 2;&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
&lt;/span&gt;&lt;/p&gt;&lt;dt style=&quot;line-height: 2; font-size: 14px; font-weight: bold;&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친구들과 독서하고 토론하는 ‘독서당’ 
&lt;/span&gt;&lt;dd style=&quot;line-height: 2; font-size: 14px;&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친구들과 만나는 방법으로 조선시대의 전통인 독서당이 있다. 친구를 만나면서 독서하고 토론하고 
공감대를 만들어 가는 문화이다. 조선시대의 독서당은 ‘호당(湖堂)’이라고도 부른다. 독서당은 서울에 인재를 모아서 독서와 토론에 집중하게 한 
제도이다. 집에서는 독서에 전념하기 어렵기 때문에, 젊은 인재들이 독서당에 모여서 독서하고 토론했다. &lt;/span&gt;&lt;font color=&quot;#9e4c30&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독서당은 세종이 1426년에 독서휴가인 ‘사가독서제 (賜暇讀書制)’를 주는 것에서 유래했다.&lt;/span&gt;&lt;/fon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 세종은 
1442년 현재 서울 은평구 북한산 기슭에 진관사(津寬寺)에서 독서하게 하는 상사독서(上寺讀書)를 실시했다. 1492년에 성종은 마포구 한강 
편에 남호(南湖)독서당을 개설하였다. 중종은 동대문구 숭인동에 있던 정업원(淨業院)을 독서당으로 만들었다가, 1517년에 현재 옥수동 근처의 
두모포(豆毛浦) 정자를 고쳐서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이라 하였다. 나중에는 각 지역에 사림으로서 재야 지식인이나 은퇴한 관료들이 자연의 경관이 
좋고 독서하기에 좋은 위치에 건물을 독서당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amp;lt;독서당계회도&amp;gt; 는 독서당을 그린 대표적인 그림이다. 그림의 하단에는 
참석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윤근수(尹根壽), 정유일(鄭惟一), 정철(鄭澈), 구봉령(具鳳齡), 이이(李珥), 이해수(李海壽), 
신응시(辛應時), 홍성민(洪聖民), 유성룡(柳成龍) 등 아홉 명으로 정철, 이이, 유성룡은 친숙한 이름이다. 이이, 정철은 서인으로, 유성룡은 
동인으로 다른 길을 걷게 되지만, 옥수동 강변에 이렇게 멋들어진 독서당을 지어서, 책을 읽고 토론했던 것이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배움의 기쁨이 친구와 함께 
하는 즐거움으로 전개되는 곳이 바로 독서의 모임이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는 방법으로 마음에 기쁨을 주는 것(學而時習之不亦說乎)’이다. 
기쁨이라는 한자를 “열(悅)”이라는 한자대신, 말한다는 부수가 쓰인 “說”을 사용하며, ‘설’로 발음하지 않고 “열”로 발음하며 일부러 사용한 
이유는 바로 ‘토론’하는 기쁨을 의도한 것이다. &lt;/span&gt;&lt;br&gt;&lt;font color=&quot;#9e4c30&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친구와의 즐거움은 서로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섭섭하지 않은 마음가짐이 중요하다.&lt;/span&gt;&lt;/fon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 &amp;lt;논어&amp;gt;의 첫 구절은 왜 배우는 기쁨과 친구와 만나는 즐거움, 다음으로 “남들이 
몰라주어도 화를 내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겠는가(人不知而不溫 不亦君子乎)“라고 마무리 한다. 인정받지 못해도 섭섭해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진실한 마음으로 공감하는 능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친구는 첫째로 나와 같이 소중하다. 둘째로는 나와 다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거리유지 
공감법’이며, 동아시아 그림에서 수없이 표현한 마음이자, 동아시아의 문화감성이다. 그리고 마음에 여유가 있다면, 상대방이 나를 인정해주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상대방의 좋은 점을 인정해 주자. 그러면 나이를 막론하고 더 많은 친구를 얻을 것이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
&lt;/span&gt;&lt;dd style=&quot;line-height: 2; font-size: 14px;&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
&lt;/span&gt;&lt;div align=&quot;center&quot;&gt;&lt;br&gt;&lt;img width=&quot;550&quot; height=&quot;528&quot; alt=&quot;&lt;독서당계회도&gt; (부분), 조선시대, 1570&quot; src=&quot;https://oimg3.kbstar.com/bbs/22/918/ssh_2_2014_07.jpg&quot; border=&quot;0&quot;&gt;&lt;br&gt;&lt;fon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lt;독서당계회도&amp;gt; (부분), 조선시대, 1570, &amp;nbsp;비단에 수묵,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보물 867호 &lt;/span&gt;&lt;/font&gt;&lt;br&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
&lt;/span&gt;&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lt;/span&gt;&lt;/p&gt;&lt;/dd&gt;&lt;p style=&quot;line-height: 2;&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
&lt;/span&gt;&lt;/p&gt;&lt;dt style=&quot;line-height: 2; font-size: 14px; font-weight: bold;&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편리함보다 친밀감이 우리를 구한다 
&lt;/span&gt;&lt;dd style=&quot;line-height: 2; font-size: 14px;&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미래 사회의 화두는 편리함보다는 친밀감이 아닐까. 사물인터넷은 모든 사물들이 연결된다는 
'초-편리함'의 생활환경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편리함 속의 소외보다, 친밀감 속의 행복감이다. SNS나 메신저의 성공도 그 
근저에는 친밀감에 대한 욕구가 가장 강력한 요소이다. '친밀감'은 가까운 미래인 초연결시대, 장수시대, 저성장시대에서 정서관리를 위해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인간의 정서이다. 친(親)공동체(friendship community)라고 명명해본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친구(親舊)라는 단어는 친한 
것이 오래되었다라는 의미이다. 한자의 뜻풀이처럼 친함이 오래가야 벗이 된다. 좋은 벗은 매달 저축하는 정기 적금과 같다. 차근차근 이자가 쌓이듯 
세월도 필요하고 정성도 필요하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에서 ‘일친우일친(日親又日親)’으로, 날마다 새롭게 하려는 것에서 나날이 친하게 
된다. 단, ‘거리유지 공감법‘ 이 중요하다. 그림을 읽어내는 ‘밀당의 심리학‘ 이 친구와 거리를 유지하는 친밀함으로 연결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
&lt;/span&gt;&lt;dd style=&quot;text-align: center; line-height: 2;&quot;&gt;&lt;br&gt;&lt;br&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
&lt;/span&gt;&lt;dd style=&quot;line-height: 2;&quot;&gt;&lt;a href=&quot;https://obank.kbstar.com/quics?page=C019868&quot;&gt;&lt;/a&gt;&amp;nbsp;&lt;/dd&gt;&lt;div class='scrap_memo'&gt;&lt;span&gt;&lt;b&gt;출처&lt;/b&gt; : 말글표현&lt;span&gt;&lt;/div&gt;&lt;div class='scrap_memo'&gt;&lt;span&gt;&lt;b&gt;글쓴이&lt;/b&gt; : 참기쁨 &lt;span&gt;&lt;a href=&quot;http://cafe.daum.net/_service/bbs_read?grpid=122uz&amp;fldid=H1nh&amp;contentval=0002Ezzzzzzzzzzzzzzzzzzzzzzzzz&quot; class=&quot;d_4F72B3 under&quot; target=&quot;_blank&quot;&gt;원글보기&lt;/a&gt;&lt;/div&gt;&lt;div class='scrap_memo'&gt;&lt;span&gt;&lt;b&gt;메모&lt;/b&gt; :  &lt;span&gt;&lt;/div&gt;</description>
      <category>나의 이야기</category>
      <author>비너스매화</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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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s://gykang2.tistory.com/119#entry119comment</comments>
      <pubDate>Tue, 30 Sep 2014 17:27:58 +0900</pubDate>
    </item>
    <item>
      <title>[스크랩] 좋은 시를 쓰는 13가지 조건, 어떻게 하면 좋은 시를 쓸 수 있을까요 ?</title>
      <link>https://gykang2.tistory.com/117</link>
      <description>&lt;!-BY_DAUM-&gt;&lt;link rel=&quot;stylesheet&quot; href=&quot;http://editor.daum.net/services/blog/css/contents4view.css?ver=1.1.114&quot; type=&quot;text/css&quot;/&gt;&lt;link rel=&quot;stylesheet&quot; href=&quot;http://editor.daum.net/services/blog/css/theme4view.css?ver=1.1.114&quot; type=&quot;text/css&quot;/&gt;&lt;script language=&quot;javascript&quot; src=&quot;http://s1.daumcdn.net/pimg/UX-JS_2008/20120321/common_view.js&quot;&gt;&lt;/script&gt;&lt;script language=&quot;javascript&quot;&gt; var articleno = &quot;47&quot;; &lt;/script&gt;&lt;!-BY_DAUM-&gt;&lt;P&gt;&lt;/P&gt;
&lt;P class=바탕글&gt;&amp;nbsp;&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tartFragment--&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 좋은 시를 쓰는 13가지 조건, 어떻게 하면 좋은 시를 쓸 수&amp;nbsp;있을까요?&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글 : 이윤정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1. 막연하게 쓰지 말아야합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막연하게 쓰려면 어려워집니다. 당신의 주장이 나타나는 뚜렷한 주제를 정하고 소재를 정한 다음, 그냥 ‘좋았다, 재미있었다. 슬펐다’ 가 아니라 어떻게 좋고, 어떻게 재미있고, 어떻게 슬픈지 구체적으로 묘사하여 보여주는 부분은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가리는 것이 더 낫다고 보이는 부분은 비유를 통하여 숨기기를 하여야 합니다 . 관념이 구체화되고 형상화되었을 때 시가 될 수 있으므로, 마냥 쓰기 보다는 묘사하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합니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2. 제목과 내용이 잘 맞아야 합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제목과 내용이 따로 놀면 감동이 없어집니다. 항상 제목과 맞는 말을 쓰고 있는지 중간 중간 확인하고 다 쓰고 나서도 꼭 한 번 더 살펴 보아야합니다 . 온갖 것을 나열하지 말고 포인트를 잡아서 줄기차게 제목하고 맞는 내용만을 선택해야합니다 . 도자기도, 그림도, 사진도, 시도 모두 악센트가 있습니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3. 남들이 경험도 못하고, 차마 생각조차 못한 것을 찾아서 써야 좋은 글입니다.&lt;/SPAN&gt;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남들이 다 알고 있고, 다 생각하는 것을 쓰면 잔소리일 뿐, 아무도 감동하지 않습니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단단한 사상과 많은 경험을 토대로 시가 되므로 우리는 그런 부분에 좀 더 눈을 뜨고 노력 할 필요가 있습니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4.문장은 간결하게 끊어주고, 살아 움직이는 문장으로 바꾸어 주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P&gt;
&lt;P class=바탕글&gt;죽은 나무를 살리고, 바위를 살리고, 들판과 하늘과 바다를 모두 살려보면 좋은 문장이 됩니다 .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cois Millet)라는 화가는 1814년 10월 4일 ~ 1875년 1월 20일까지 살았던 프랑스 출생의 세계적인 화가입니다.&lt;/P&gt;
&lt;P class=바탕글&gt;이 사람은 만종을 그릴 때 황금 높이를 설정하여 농부 부부의 키가 하늘에 더 올라가거나 더 내려오게 하지 않고 적당한 높이를 설정하여 그림의 답답함을 없도록 하고 경건, 우수, 숭고함, 진실감을 더욱 돋보이게 했습니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시의 문장도 이와 마찬가지로 너무 욕심을 부려 내용을 압축하여 나타내야합니다 .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5. 나열이나 사실기록 보다는 묘사를 해야 합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풍광이나 사물, 사실을 나열하는 일기나 역사와 같은 기록 보다는 치밀하게 느낌을 묘사해야 합니다. 한 편의 시는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 긴 드라마가 시 한 편에 녹아 있어야 합니다. 하나의 주제와 소재를 정하면 작가의 무한한 상상력을 집요하게 펼칠 수 있어야합니다 .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6. 시는 정확한 어휘력으로 과장 없이 진솔하고 젊게 써야합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문체나 글만 보면 저자의 나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젊은 문체로 신선하게 써야합니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정확한 어휘력을 키우고 과장이 없이 진솔하게 써 내려 간 글에서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어대사전을 수시로 읽어보고 적어보거나 시를 쓰는데 필요한, 개인 시상노트와 개인 단어장을 만들어서 따로 관리합니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7. 구어체나 욕설, 혐오스런 단어를 사용 하지 않아야 하며, 표준어를 사용 합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P&gt;
&lt;P class=바탕글&gt;옛날 말투(하리라, 오리라, 가노라, ...)를 그대로 인용하거나 감탄사(아아, 오오! ...)를 난발하거나, 또는 한문투를 자주 사용하거나, ‘나는, 나의, 내가 ....’ 와 같이 일인칭이나 ‘그런데, 그러나, 그래서, 그러므로, 그렇지만 ’ 과 같은 접속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 또, 한두 군데 나타나는 사투리는 삼가고 전체 문장을 방언시로 정하여 쓰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8. 보여주기와 감추기를 적절히 반반 비율을 염두에 두고 써 내려갑니다&lt;/SPAN&gt;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반은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나머지 반은 비유를 끌어와서 숨기기를 하면 좋은 시가 되는데 수월해집니다. 풍경만을 그려 보여주거나 사물만 그리다가 정작 화자가 하고자 하는 말이 빠진 시가 되지않도록 화자가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도 중요하지만 인간 사는 세상이야기나 자신의 마음을 그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비중을 잘 분배 하는 요령을 터득 하도록 해야 합니다 .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9. 한 편의 시 안에서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거나 뜻이 중복되는 단어가 있으면 안됩니다&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P&gt;
&lt;P class=바탕글&gt;자신의 감정에 도취되어 할 말에 욕심을 부리면 모두 나열하게 되는 수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사설이 길어져서 문장이 늘어지며, 문장이 늘어지면 주제가 한 눈에 쏘옥 들어오지 않게 되기 일쑤입니다. 시는 짧은 문장 안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시의 특징입니다 . 이 특징에 맞게 쓸 때 좋은 글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같은 뜻이 담긴 단어를 나열하여 중복시키는 것도 예술성을 떨어지게 합니다 .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10. 너무 친절하지 말며, ‘낯설게 하기로 독자의 몫도 남겨 놓습니다.&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독자가 생각 할 것을 남겨놓지 않고 마지막까지 모두 말해주는 유치원선생님처럼 지나치게 친절하면 좋은 시가 될 수 없는 조건을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독자가 시를 읽고 생각 해 보며 맛을 음미하는 여백의 시간을 남겨주는 시가 좋은시로 평가되는데 이것을 '낯설게 하기'와 '침묵의 기법'이라고 합니다.&lt;/P&gt;
&lt;P class=바탕글&gt;시인이 아닌 사람들이 쓰는 상투 언어에서 벗어나 '낯설게 하기' 기법을 익혀 쉽게 감동을 불러 오도록 합시다 . &lt;/P&gt;
&lt;P class=바탕글&gt;상투의 틀에 붙잡히지 말고 끊임없이 새로운 긴장감으로 분위기만 그리다 마는 감상적인 시의 틀을 깨고 '시적인 것'을 구사하도록 해야합니다 . 감상적인 표현과 싯적 표현을 확연히 구분 할 줄 알아야 합니다.&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11. ‘침묵의 기술, 생략의 기술'을 익힙니다&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P&gt;
&lt;P class=바탕글&gt;시와 유행가의 차이는 그것이 침묵인가 아닌가의 차이입니다. 시는 감상이 아니라 우리를 긴장시키는 힘이 있는 것인데, 만약 설명하려다보면 감상의 넋두리로 떨어져 버리게&lt;/P&gt;
&lt;P class=바탕글&gt;된답니다. 침묵하는 부분이 많을수록 그 시는 성공 할 것이다'라고 말라르메는 말했습니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바람이 분다. /살아야 겠다.&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이 짧은 두 행의 사이에는 시인 자신이 말로 설명하지 않은 수 많은 말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음이 보입니다.&lt;/P&gt;
&lt;P class=바탕글&gt;침묵의 기술을 익히려면 많은 연습이 필요한 법. 우리는 많이 쓰고 또 그 만큼 많이 지워야 합니다. 시를 쓸 때도 다른 모든 세상일처럼 피나는 연습이 필요하며 더욱이 말로 다 설명하지 않으면서 형상화하는 데에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음식을 만들 때도 음식 재료를 너무 여러 가지 좋다는 것은 다 넣으면 잡탕이 되어 버립니다 . 제일 메뉴가 많은 음식점인 ‘김밥천국 24시’ 그런데는 가격이 제일 싸답니다 . &lt;/P&gt;
&lt;P class=바탕글&gt;확실하게 한 가지만 파는 한정식집, 해물전문점,고기전문점은 가격이 비싸지요 ?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12. 시는 감동이 있어야합니다.&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싯적 감동은 정신적으로 전율을 느껴야만 나올 수 있습니다. 시는 기록문이 아니라 예술이므로 반드시 감동을 줄 수 있어야합니다 . 자신의 글을 읽고 과연 타인이라면 감동이 올 것인지 마지막으로 꼭 검토를 해야 합니다. 자신이 감동하지 않은 글을 남들이 감동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 자신이 감동이 오지 않는다면 그 글은 발표를 하면 예술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13. 독자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합니다 &lt;/SPAN&gt;. &lt;/P&gt;
&lt;P class=바탕글&gt;
&lt;P class=바탕글&gt;미술을 모르는 사람한테도 밀레의 ‘ 만종’ 이나 ‘이삭줍기’, '씨 뿌리는 사람' 등 농부들의 일상을 그린 작품들이 의뢰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것은 바로 그 당시의 시대적, 환경적인 대중의 마음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주의(Realism) 혹은 자연주의(Naturalism) 화가라 불리고 있는 그는 데생과 동판화에도 뛰어나 많은 걸작을 남겼지요. 시인으로 살면서 흉내만 내다 가는 문인이 있고, 이와 같이 밀레처럼 유명한 예술작품을 남기고 가는 문인이 있는데 그 차이는 바로 이런 13가지의 요소를 충실히 지켰느냐의 차이이며 결과입니다 . &lt;/P&gt;
&lt;P class=바탕글&gt;&lt;/P&gt;&lt;/SPAN&gt;&lt;div class='scrap_memo'&gt;&lt;span&gt;&lt;b&gt;메모&lt;/b&gt; :  &lt;span&gt;&lt;/div&gt;</description>
      <category>스토리1</category>
      <author>비너스매화</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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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31 Mar 2014 19:23:2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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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스크랩] 라캉 정신분석학이란 무엇인가?</title>
      <link>https://gykang2.tistory.com/113</link>
      <description>&lt;!-BY_DAUM-&gt;&lt;P&gt;&lt;FONT color=#4682b4&gt;&lt;STRONG&gt;라캉 정신분석학이란 무엇인가?&amp;nbsp;&amp;nbsp;&amp;nbsp;&lt;BR&gt;&lt;BR&gt;&lt;BR&gt;&lt;/STRONG&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라캉 정신분석학이란 무엇인가? 라캉의 사상사적 의의는? 적어도 인문학도들―그리고 최근에 와서 심리학도와 의학도―사이에서 자주 던져지는 이런 질문을 들을 때마다 솔직히 말하면 당혹감을 느낄 때가 많다. 라캉 전공자에게 언제라도 주어질 수 있는 이러한 ‘당연한’ 질문에 대해 답변해야 할 ‘의무’가 있는 필자로서도 한두 마디의 잘 정리된 깔끔한 답변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자책 때문일 것이다. ‘영특하게도’(?) 필자는 이런 자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의 원인을 라캉의 탓으로 돌리는 ‘편리한’ 심리기제를 발달시켰다. 의도적으로 라캉이 정신분석학을 복잡한 학문으로 만들었고, 그것에 대한 접근을 어렵게 했으니 ‘라캉 요약판’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이다. &lt;BR&gt;&lt;BR&gt;&amp;nbsp;&amp;nbsp; 우리는 라캉의 글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프로이트는 쉽지만 라캉은 어렵다”고. 정말 그럴까? 어쨌든 라캉은 학문을 마치 ‘유행’처럼 취급하는 현대인의 심성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정말이지 라캉의 이론이 쉬웠다면 우리는 벌써 “라캉은 한물 갔다”라고 의기양양하게 선언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푸코는 한물 갔다”, “독일 철학은 한물 갔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우리의 이러한 학문적 풍토를 짐작이라도 했듯이 라캉은 정신분석학을 어렵게 만듦으로써(물론 푸코나 독일 철학이 쉽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꾸준히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학문 앞에서 우리를 겸허하게 한다. 라캉은 간단해 ‘보이는’ 것을 복잡하게 만들 줄 아는 탁월한 재능의 소유자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정신분석학이 이러한 라캉의 취향 때문에 쓸데없이 어려워졌다고 불평할 수도 있다. 하지만 (프로이트와 함께) 라캉 자신이 곧 정신분석학이라면? 그렇다면 어렵게 만드는 라캉의 취향을 개인의 취향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지 않겠는가? ‘복잡함’은 단순히 라캉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정신분석학 자체’의 ‘취향’이요 ‘본질’일 수 있다는 말이다. &lt;BR&gt;&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그렇다면 라캉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무엇보다도 프로이트의 글도 어렵다는 ‘진지한’ 자세를 가지고 출발할 필요가 있다. 프로이트의 어려움의 깊이를 절감한 사람만이 라캉 이론의 독창성을 잘 파악할 수 있다고 필자는 믿는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라캉을 읽지 않고’ 프로이트만 읽은 상태에서 프로이트의 복잡한 논의를 ‘스스로’, ‘체계적으로’ 정리해 보려고 애쓴 경험이 있는 사람은 라캉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물론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정도의 철학 지식과 (변증법적) 논리학 훈련이 필요하다}. 라캉의 글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라캉은 ‘어려운’ 프로이트의 글을 정확히 이해시키기 위해 ‘체계적인’―철학적인―설명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lt;BR&gt;&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왜 라캉은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어려운 길을 택했는가? 라캉이 엘리트주의자이기 때문인가? 하지만 이런 비판은 무의미하다. ‘유명한’ 사람치고 엘리트가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유는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라캉은 ‘미국적 정신분석학’―자아심리학―을 통렬히 비판했다. 왜 그랬을까?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라캉이 보기에 자아심리학자들 혹은 이에 영향받은 사람들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을 이해하기 쉽게 만들었고, 그럼으로써 정신분석학을 ‘상식적인’―즉 이데올로기적인―세계관에 통합시켰기 때문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정신분석적 치료란 무엇인가? 자아심리학적 견해에 의하면 치료란 환자의 자아를 강화하여 그를 사회에 보다 잘 적응시키는 것이다. 즉 이들의 견해에 따르면 치료란 치료비를 부담하는 환자 혹은 환자의 보호자가 원하는 상태로 그(녀)를 회복시켜 사회에 신속히 적응하도록 돕는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쉬운’ 해답이다. 그리고 결코 틀린 대답도 아니다. 어느 누가 이 점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정신분석학은 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프로이트는 치료를 사회에의 적응의 문제로만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환자가 적응해야 한다고 기대되는 저 사회 자체가 문제투성이라면? 그렇다면 환자가 사회에 적응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사회가 환자에게 적응해야 한다.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신경증의 예를 들어 이 점을 설명한다. 어떤 여자가 신경증에 걸렸다면, 그녀의 신경증은 경우에 따라서는 남편에 대한 복수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 경우 아내의 치료를 위탁한 남편의 성격과 생활이 바뀌지 않는다면 아내의 신경증은 쉽게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신경증이 치유된다 하더라도 그 여자는 회복 즉시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할 것이다. 라캉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이러한 복잡한 측면을 염두에 두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lt;BR&gt;&lt;BR&gt;“우리는 정신분석학적 개입을 정의 및 용기에 관한 근본적인 대화로까지, 즉 위대한 변증법적 전통 속으로 밀어 넣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의 질문이다. 그것은 풀기 어려운 질문인데, 솔직히 말하자면 현대인은 그러한 커다란 주제에 접근하기에 너무 미숙해졌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행동, 적응, 집단 도덕의 관점에서 그리고 잡담으로써 일을 해결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여기에서…문제의 심각성이 생겨나는 것이다.”1) &lt;BR&gt;&lt;BR&gt;정신분석학은 심리 치료를 위한 학문이라고 간단히 말한들 누가 시비를 걸겠는가? 그런데도&amp;nbsp;&amp;nbsp;라캉은 정신분석학을 “정의와 용기에 관한 근본적인 대화”로 확대시켜야 한다고 ‘현학적으로’ 말한다. 여기에서 “정의와 용기에 관한 근본적인 대화”란 플라톤의 철학을 의미한다. 라캉은 정신분석학을 플라톤적 전통―위대한 변증법적 전통―속에서 고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알랭 바디우가 말했듯이 이는 라캉의 “플라톤적 몸짓”이다(물론 라캉이 언급하는 철학자가&amp;nbsp;&amp;nbsp;플라톤밖에 없다는 말은 아니다. 라캉이 관심을 가졌던 철학자는 플라톤 이외에도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 헤겔, 맑스, 후설, 메를로-퐁티,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퍼스 등 수없이 많다) 하지만 현대인은 그러한 커다란 주제에 접근하기에 너무 미숙해졌으므로, 그저 “행동, 적응, 집단 도덕”의 관점에서 “잡담”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lt;BR&gt;&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말이 난 김에 치료의 문제에 대해 조금 더 논의해보자.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라캉은 “행동주의”적 치료 개념을 비판한다. 행동주의적 치료와 정신분석학적 치료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분리불안’ 사례를 통해 이에 대해 살펴보자. 존슨(Johnson)은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학교에 가는 어린이들에게서 나타나는 고통과 애착행동을 묘사하기 위해 ‘분리불안’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바 있다. 이런 어린이들은 부모나 다른 애착을 갖는 사람들로부터 떨어질 때 불안함을 느끼기 때문에 이들에게 매달리는 의존적인 행동을 한다. 이 어린이들은 부모로부터 격리되면 사고나 질병 등이 발생할 것이라는 공포 혹은 악몽, 환상에 사로잡히며 심한 공황 증세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분리불안을 겪는 어린이들은 혼자 잠을 들지 못하고, 보통 부모가 같이 있어야 안심하고 잔다. 두통, 어지럼증, 구토 등의 신체 증상을 동반하기도 하는데, 대개 이런 증상은 격리나 격리될 조짐에 대한 반응으로 일어나며, 불안 증세와 결합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흔하다. &lt;BR&gt;&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로버트 메이어(Robert Meyer)는 &amp;lt;&amp;lt;이상심리학&amp;gt;&amp;gt;에서 전형적인 분리불안 증세를 보였던 줄리(Julie)의 사례에 대해 보고하고 있다. 줄리는 여덟 살의 초등학교 2학년 소녀로서, 다섯 살 때 사촌의 친구들에 의해 성적 학대를 당한 경험이 있다. 아이는 계속적으로 학교에 무단 결석했으며, 법원으로부터 병원치료를 받으라는 권고를 받았다. 이 아이에게 추천된 치료요법은 ‘가족치료’였다. 상담자는 주로 어머니가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모든 문제에 대해서 어머니의 편을 들었다. 그리고 주로 어머니가 딸의 등교 거부나 다른 문제행동을 잘못된 행위로 볼 수 있게 하도록 노력했다. 또 딸이 집에 머무는 것을 덜 좋아하도록 징계체계를 고안했다. 이 징계는 처음에는 줄리의 등교를 촉진시켜 주었지만 줄리는 곧 다시 등교버스를 두려워했고, 그 어머니는 딸의 두려움을 동정하게 되어 징계를 강화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 줄리의 치료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로버트 메이어는 치료 실패의 원인을 다음의 두 가지로 정리했다. &lt;BR&gt;&lt;BR&gt;① 등교 거부는 어머니에 의해 부추겨진 면이 있다. &lt;BR&gt;&lt;BR&gt;② 계속적으로 등교 거부를 하면 영원히 가족과 격리할 것이라고 위협을 주었던 법적 조치로 인해 줄리가 입었던 격리와 상실의 상처, 즉 분리불안을 더욱 파괴적으로 심화시켰다. &lt;BR&gt;&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이제 여기에서 우리는 로버트 메이어가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메이어는 줄리의 치료가 실패한 이유는 궁극적으로 상담자가 ‘행동주의 요법’을 채택했기 때문이라는 근본적인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 로버트 메이어는 줄리의 치료를 위해 추천된 방법을 “가족치료요법”이라고 불렀지만, 사실상 줄리의 치료는 ‘칭찬과 징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행동주의 치료법이었다. &lt;BR&gt;&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이미 언급했듯이 계속적으로 등교 거부를 하면 영원히 가족과 격리할 것이라는 법적 조치가 치료의 실패를 야기한 요인 중의 하나였다고 메이어는 지적한다. 여기까지는 설득력 있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는 실패의 또 다른 원인으로 어머니의 책임을 들고 있다. 어머니가 줄리의 등교 거부를 부추겼다는 것인데, 메이어의 사례 해석의 문제점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바로 여기이다. 줄리가 분리불안으로 인하여 등교하기를 원치 않았을 때 응분의 징계를 가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문제가 심화되었다고 메니어는 말한다. 물론 어머니가 강력한 징계의 방법을 사용해 줄리로 하여금 등교하도록 만들었다면 법원이 가혹하게 개입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강력한’ 징계가 줄리의 불안증세를 더욱 가중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을 왜 메이어는 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어머니의 징계는 법원의 징계와 마찬가지로 치료의 실패 원인이 된다. 왜 어머니가 아이의 등교 거부를 승낙했겠는가? 사례 보고에서도 암시되어있듯이 아이의 불안증세가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조차도 행동주의 심리학이 추천하는 대로 징계를 강화해서 아이를 무조건 학교에 보내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을까? 요컨대, “어머니의 부추김”을 치료 실패 원인으로 단언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물론 줄리는 어머니로부터 심리적으로 독립해야 하며, 어머니도 이를 도와야 한다. 그러한 한에서 우리는 아이의 의존심을 부추겼던 어머니의 태도를 치료 실패의 원인으로 볼 수는 있다. 하지만 보다 궁극적인 치료 실패의 원인은 아이의 불안 심리를 칭찬-처벌이라는 ‘단순한’ 메커니즘으로 ‘조정’할 수 있다고 믿는 ‘잘못된 행동주의적 행동주의적 인간관’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lt;BR&gt;&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사례 보고서에도 나와 있듯이 줄리는 어렸을 적에 사촌의 친구들에 의해 성적 학대를 당한 경험이 있다. 그렇다면 줄리의 치료를 위해서는 행동주의적 요법이 아니라 정신분석치료가 추천되었어야 옳다. 이미 프로이트는 백 년 전에 신경증의 병인(프로이트나 오토 랑크에 따르면 분리불안도 신경증 증상 중의 하나이다)으로 유아기의 성적 학대 경험을 제시한 바 있지 않은가? 물론 어느 경우에나 정신분석적 치료법이 적용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만병통치약’은 없다. 그럼에도 여기에서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적어도’ 성 문제와 관련해 심리 질환이 발생한 경우라면 정신분석학적 접근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이다. 프로이트가 밝혀 내었듯이 유아기의 성적 체험(사실상 이는 신경증 환자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사람들의 삶도 지배한다. 아무도 유아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이 신경증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 점을 밝힌 것이 프로이트의 불후의 공헌이다(여기에서 한두 페이지 지면으로 프로이트의 ‘복잡한’ 이론을 설명하기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독자들은 잊지 말 것을 다시 한번 당부하고 싶다). 프로이트는 많은 사람들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인정하기를 꺼려했던 이 ‘어두운’ 사실을 용기 있게 드러내, 이를 이론적으로 ‘엄밀히’ 정리해 내었다. 물론 지금까지도 이 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프로이트를 판섹슈얼리스트로 몰아부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이 있기는 하지만…. &lt;BR&gt;&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줄리 사례를 통해 우리는 한 ‘개인’의 심리 질환을 치료한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행동주의자나 자아심리학자처럼 치료의 목표를 사회에로의 적응으로 보는 견해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 심리질환자를 사회에 적응시킬 것인가? 하지만 이보다 근본적인 물음은 심리 질환(신경증)의 원인이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이 물음은 단순히 자연과학적 차원에서 어떤 현상의 ‘원인’을 찾는 문제가 아니다. 이 물음은 궁극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포함하고 있다. 대 철학자 칸트도 철학적 물음은 궁극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의 문제는 곧 가족과 사회의 문제이며, 또 성과 사랑의 문제이며, 관계와 권력,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문제이며, 윤리, 정의, 용기의 문제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프로이트는 이 모든 복잡한 문제들을 정신분석학이라는 이름 하에 총체적으로 정리하는 것에 성실한 학자로서의 삶을 바쳤다. &lt;BR&gt;&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그렇다면 라캉은 어떠한가? 그는 ‘제2의 정신분석학 혁명’을 가져온 사람이라고 평가된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페터 비트머는 이렇게 정리한다. 첫째, 라캉은 “프로이트 이후의 세대를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의 진정한 의도를 오해 혹은 은폐”한 시대로 간주했다.“ 그리하여 라캉은 ”프로이트가 &amp;lt;&amp;lt;초안&amp;gt;&amp;gt;이라는 글과 빌헬름 플리스(Wilhelm Fließ)와의 서신 교환에서…전통적인 형태의 심리학을 철저히 전복할 것을 선언한 것처럼, 정신분석학의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갔다.” 둘째, 라캉은 ”프로이트가 아직 완전히 프로이트주의자가 되지 못한 곳에서…그를 철저히 프로이트화“했다. 이를 위해 라캉은 언어학, 철학, 신학, 수학 그리고 필요하다면 심리학(라캉에 따르면 정신분석학은 심리학이 아니며, 또 의학도 아니다!)에서 개념들을 빌려왔다. 따라서 라캉을 읽기 위해서는 ”더 많은 배경지식“이 필요하며, 라캉을 읽기가 어려운 것도 바로 이에 연유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라캉은 정신분석학을 ‘철학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여기에서 철학이란 전통-형이상학적 철학이 아니라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라캉에게 철학이란 어떤 현상이나 학문을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특정한 철학 학파나 제도에 얽매이는 철학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용기 있는 자세, 탐구자의 자세로서의 철학을 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라캉을 읽기 위해서는 철학사에 대한 상당한 지식이 필요하다. 이렇게 해서 라캉은 정신분석학에 대한 접근을 의도적으로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lt;BR&gt;&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라캉 정신분석학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오해를 지적해보자. 첫째, 라캉은 반(反)철학자라는 주장이 있다. 라캉은 전통-형이상학 철학을 비판하기 위해 ‘정신분석학과 철학은 다르다’라고 종종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정말로 정신분석학과 철학은 상극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커다란 잘못이다. 이러한 잘못된 주장은 라캉의 사상사적 의의를 오해하는 것에서 연유한다. 라캉의 논의는 두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정신분석학은 철학이 아니라는 주장은 우선 정신분석학을 전통 철학으로 흡수하여 해체하려는 사람들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언급했듯이 다른 한편으로 라캉은 정신분석학의 이론적 근거(프로이트는 이를 “메타심리학”이라고 불렀다)를 정확히 해명하기 위해서는 ’철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철학자들과 연루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라고 라캉은 말한다. 둘째,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지어져 있다”라는 라캉의 명제로부터 사람들은 ‘라캉은 구조주의자다’라는 결론을 이끌어 냈으며, 이에 상응해 라캉을 ‘주체의 죽음’을 역설한 사상가로 ‘분류’해왔다. 정말 라캉은 주체의 죽음을 주장했는가? 그렇지 않다. 이 점에 대해서도 라캉은 “무의식과 관련해 내가 ‘주체’를 논하는 것은 아마도 새롭게 여겨질 것이다”라고 분명히 못 박아 말한다. 하지만 꼭 라캉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프로이트를 정독한 사람에게는 ‘주체가 죽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다. 정신분석학은 ‘의식 철학자’들과는 달리 ‘분열된 주체’를 말하지만, 그럼에도 정신분석학은 그 분열된 주체가 타인들과 세계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 ‘이상적’인지를 탐구하는 학문 분과이다. 한마디로 정신분석학은 ‘주체학’이다. 그것은 ‘주체 범주’를 요청한다.2) &lt;BR&gt;&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라캉은 자신의 ‘프로이트로의 복귀’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가? 여러 가지로 논의할 수 있겠지만 실재, 상징계, 상상계라는 그의 ‘유명한’ 세 범주와 관련해 라캉과 프로이트의 이론적 관계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라캉의 필생의 작업은 이 세 범주를 가지고 프로이트 이론을 재구성하는 것이었다고 ‘한마디로’ 정리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글을 맺어야 할 때가 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amp;lt;&amp;lt;실재, 상징계, 상상계&amp;gt;&amp;gt;라는 라캉의 후기 세미나를 한 구절 인용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lt;BR&gt;&lt;BR&gt;“프로이트는 상상계, 상징계 그리고 실재에 관해 내가 가지고 있는 개념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R.S.I.(실재, 상징계, 상상계)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다. …나는 그의 담론으로부터, 서서히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나의 세 범주를 이끌어냈다. 나는 상상계로부터 출발하였다. 그리고 나는 나를 이끌었던, (하지만) 모든 것을 제공하지는 않았던 언어학과 더불어 상징계의 역사를 씹어야 했다. 그리고 나는 매듭의 형태로 여러분에게 그 유명한 실재를 꺼내줌으로써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프로이트는 라캉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프로이트가 나의 세 범주―그의 발밑으로 미끌어져 들어간 바나나 껍질―를 어떻게 잘 처리하는지 보기 위하여 그에게 이 세 범주가 이미 있었다고 가정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없다.”3) &lt;BR&gt;&lt;BR&gt;&lt;BR&gt;라캉에 따르면, 프로이트는 이 세 범주(실재, 상징계, 상상계)를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프로이트는 라캉주의자가 아니다. 비록 “프로이트에게 그 세 범주가 이미 있었다고 가정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없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lt;BR&gt;&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라캉은 프로이트를 ‘완전히’ 넘어섰다고 자랑하려는 것일까? 라캉은 프로이트를 완벽히 극복한 라캉주의자인가? 아니다. 라캉은 여전히 프로이트주의자였다. 라캉은 마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려는 듯하다. 라캉주의를 창시한 라캉은 라캉주의자가 아니라 프로이트주의자라고. 그리고 이 궤변 아닌 궤변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정신분석가가 될 자격이 있다고.&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추종자들의 온갖 비난 속에서 라캉은 &amp;lt;파리 프로이트 학회&amp;gt;를 해체하고 새로운 학회(&amp;lt;코즈 프뢰디엔느&amp;gt;)를 창설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다음의 말을 남긴채. &lt;BR&gt;&lt;BR&gt;&lt;BR&gt;“나는 나의 코즈 프뢰디엔느(Cause freudienne)의 창립을 앞두고 여기에 왔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그 형용사(프로이트적이라는 형용사: 필자)를 고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여러분은 라캉주의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프로이트주의자입니다.”4) &lt;BR&gt;&lt;BR&gt;라캉의 유혹 : 라캉 언어모델과 기표의 좌절&lt;BR&gt;&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f(S...S')S = S(--)s&lt;BR&gt;&lt;BR&gt;환유작용은 기표와 기의의 연결구조 속에서 발생하는데, 이 끝임없는 기표의 연결고리 속에서 대상은 스스로를 완전하게 구현하지 못하고 결핍만을 드러낸다. 바로 그 결핍을 메꾸기 위해 의미작용은 대상 대신에 욕망을 등장시킨다. 처음의 연산식에서 기표가 기의로 단순히 환원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저항선(--)은 그대로 남아 의미에 저항하는 저항선이 된다. &lt;BR&gt;&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f(--)S = S(+)S&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lt;BR&gt;하나의 기표가 또 다른 기표를 대체할 때, 창조적이고도 시적인 의미가 만들어 진다. 의미작용을 만들어내는 S'는 환유 속에서는 잠재해 있지만 은유 속에서는 그 모습을 드러낸다. + 라는 기호는 저항선을 뚫고 의미가 생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라캉은 이 지점에서 주체의 기능을 말하려한다. 그는 테카르트적인 주체관(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을 초월적 주체의 의심할 나위없는 투명성으로 보고 그 명제를 무의식에서 문자의 기능(즉 은유와 환유의 과정)을 통해 거꾸로 전복한다(환유축과 마찬가지로 은유축의 의미추구도 주체의 인식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진행된다. 내가 나의 존재의 실현에 모든 주의를 다 기울일 때도, 또한 은유의 과정을 의식하지 못할 때에도 나는 이미 은유의 과정 속에 들어와 있다). 의미를 만들기 위한 은유와 환유의 놀이는 아주 능동적이고도 강렬한 측면을 가지고 있어 횡선아래로 억압되어 의미를 거부하는 기표와 존재의 결핍 사이에서 나의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이 놀이는 돌이킬 수 없는 미묘함에서 그만이라고 선언될 때가지 계속된다. 그러나 이 놀이 속에서 나는 내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놀이 속에서 나의 고유한 위치를 차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아닌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할 수 없는 곳에 존재한다, 라캉은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다. 자유자재로 사고 할 수 있는 곳에서 나는 항상 내가 아니며 의식적으로 사고 할 수 없는 곳에서만 나는 나일 수 있다(166쪽). &lt;BR&gt;무의식적 욕망은 결코 소멸될 수 없다. 결코 만족될 수 없으며 단순히 소멸되지도 않는 욕구가 없다면 욕망도 가능하지 않겠지만, 그러한 상태는 곧 유기체의 파멸을 의미할 뿐이다. 무의식은 기원이나 본능으로 설명할 수 없고 기표의 요소들로 이루어졌다(170). &lt;BR&gt;&lt;BR&gt;3) 문자, 존재 그리고 타자&lt;BR&gt;&lt;BR&gt;라캉은 프로이크의 발견이 목표로 하고있는 것은 &quot;나는 무의식이 있던 그 자리로 가야만 할 것이다&quot;라는 말로 정의될 수 있다고 말한다. 주체가 자기 내부에 자기가 의식하고 규제하지 못하는 이질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면 정신분석학적 통찰이 갖는 질서와 방법 모두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갈 것이다. 이것이 프로이트가 발견했던 진리요 안간의 근본 존재조건이기 때문이다. 주체가 자기 내부에 스스로 지배할 수 없는 이질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고려되지 않을 때 정신분석학은 단순히 타협적인 전술에 불과한 것이 되고 프로이트의 작업이 갖는 문자성과 정신적 측면 모두를 부인하게되는 결과를 초래한다(171쪽). &lt;BR&gt;&lt;BR&gt;나는 나 자신보다도 이 타자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스스로 자기동일성을 확증하려는 바로 이 순간에도 나를 동요시키는 타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타자는 단순히 나와 다른 또 하나의 주체가 아니다. 타자의 존재는 타자성의 두번째 단계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타자는 또다른 주체가 아닌 주체가 환기할 수 없는 이질성으로 이해될 때에야 비로소 나와 다른 주체 사이에서 중재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무의식이 타자의 담론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개별 주체들을 넘어선 어떤 차원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거기서 욕망은 타자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욕망이 된다(172쪽). 욕망은 환유일 뿐이다(175쪽). &lt;BR&gt;&lt;BR&gt;4. &lt;BR&gt;라캉은 프르이트의 무의식이 갖는 위력을 분명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그가 비판하려는 주체론의 관념적 견해들, 요컨대 &quot;초월적 주체의 투명성&quot;이니, &quot;통합적 개인성&quot;과 같은 견해들을 비판하는 데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유용한 틀거리를 제공해 준다. 그는 계속해서 그의 무의식 이론이 단순하게 심리학적인 범주에 기초한 기술의 문제로 환원되어서는 안된다고 누차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프로이트 무의식을 전유하려는 라캉의 프로젝트는 제대로 이루어진 것인가? &lt;BR&gt;&lt;BR&gt;라캉과 같이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대해 주의를 기울였던 알튀세르가 라깡과 프로이트 사이에서 동요한 사실은 라캉의 프로이트 전유의 오류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알 수 있다. 1964년에 쓴 [프로이트와 라캉]이란 글에서 알튀세르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라캉을 따라 독해하고 있는데, 그의 논지는 라캉의 상상계/상징계, 은유/환유 장치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소위 중심없는 주체의 위치를 제기한다. 그러나 1976년에 쓴 [맑스와 프로이트에 대하여]라는 글에서는 여전히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주목하면서도 라캉의 논지가 거의 들어가 있지않은데, 그 결정적인 차이가 바로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스피노자식의)육체이론과 결합했다는 데 있다(&quot;프로이트의 무의식은 비정신적인 것, 혹은 비정신적인것에 의해 파생되는 어떤 효과와 동일화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정신적인 어떤 것이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하나의 물질적 실재도 아니고, 하나의 사회적 실체도 아니다......그는 생물학적인 것에 의해 본질 규정되는 모든 무의식적 소망으로부터 충동을 해방시킨다. 즉 충동은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 사이의 하나의 경계 개념이다&quot;). 알튀세르는 결론적으로 프로이트 무의식을 언어적 표상체계로 환원하려는 것을 거부했고, 무의식의 육체적 잠재력(혹은 이드의 잠재력)에 대해 주목한 것이다. 역으로 말한다면 라캉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표상체계로 설명하면서 그 무의식의 혁명적 잠재력을 그 체계 안에 가두고 말았다. &lt;BR&gt;&lt;BR&gt;요컨대 들뢰즈와 가타리가 무의식과 욕망의 문제를 놓고 비판하는 것은 그것들 자체라기 보다는 그것들의 표상체계이다. 이들이 공격하는 것은 기호의 체계, 코드의 체계이고, 욕망을 기호로 억압하려는 표상체계이다(대표적인 정신분석학의 표상체계가 외디푸스론이다). 이들이 욕망의 자생적인 흐름과 탈코드화하는 유목민적인(nomadic) 생활, 기계론적 일원론을 내세우는 것도 모드 주체를 표상체계로 결정하려는 것에 대한 반대이다. &quot;얼마나 라캉주의의 많은 해석들이 구조적 외디푸스화를 환기시켰는가&quot;라고 말하는 이들의 지적은 라캉의 상징 질서의 표상체계를 비판하는 것이다. 라캉이 옳은지, 들뢰즈 옳은지는 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 &lt;BR&gt;&lt;BR&gt;라캉,&lt;BR&gt;&lt;BR&gt;사랑에 빠진 두 연인은 서로에게 인정받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 사랑의 요구는 연인들의 갈망을 채워주기는 커녕 점점 더 큰 욕망의 화로 속으로 밀어넣어 두 사람을 외롭게 만든다. 인정받고 싶을수록 갈망이 클수록 외로움은 더욱 커질 뿐이다. 사랑은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에 손안에 넣을 수가 없다. 그것은 원초적인 힘이요, 대상을 향한 요구(demand)이다. 그러나 연인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성적 욕구(need)의 충족일 뿐이다. 요구는 추상적인 것이요, 욕구는 구체적인 것이기에 그 차액은 늘 남아 연인을 외로움에 떨게 하고 결핍에 시달리게 하고 끝없이 욕망 속을 헤매이게 한다. &lt;BR&gt;&lt;BR&gt;프로이트가 중요시했던 성본능은 무의식과 마찬가지로 자아의 자율적인 능력을 강조하던 모던시대에 와서 억압되었다. 라캉은 성본능을 다시 귀환시켜 새롭게 해석해낸다. 특히 남녀 사이의 차별이라는 당대 사회를 반영했던 프로이트 이론이 남녀평등 혹은 여성이론이 부상되는 라캉의 시대에 어떻게 재해석되는지는 중요하다. 라캉은 페미니스트들에게 많은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lt;BR&gt;&lt;BR&gt;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서 유아기의 성심리를 설명했다. 남아는 어머니의 남근이 되려는 갈망으로 아버지를 증오하고 , 여아는 반대로 남근을 선망하여 아버지를 원하고 어머니를 증오한다. 이런 증상은 유아기를 벗어나 남근기로 접어들면서 사회성을 얻게 되는데 이때 작용되는 것이 거세 콤플렉스이다. 거세공포를 느낀 아이는 어머니의 남근이 되려는 갈망을 포기하고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또 하나의 아버지를 꿈꾼다. 여아는 자신이 결핍의 존재임을 깨닫고 어머니를 질투하고 아버지(남근) 를 선망한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이런 성본능과 성차별 이론이 '도라의 경우' 어긋남을 보게 된다. 도라는 여성이었지만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했고 남성적 요소를 내보였기 때문이다. &lt;BR&gt;&lt;BR&gt;라캉은 남근을 생물학적인 성의 기관이 아닌 다른 것으로 바꾸어버림으로서 이런 모순과 성차를 해결한다. 남근은 남성의 상징으로서 여성에게는 없는 결핍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태고적 부터 남녀는 왜 끊임없이 대상을 찾아 헤매고 사랑의 욕망은 결코 충족되지 못하는가. 왜 성적결합 이후에도 욕망은 여전히 남아 있는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거세 콤플렉스는 라캉에 오면 상상계와 상징계가 되고 이 둘은 변증법적으로 연결되어 욕망은 여전히 남는다. 주체(아들)는 대상(타자, 어머니)을 남근으로 믿고 자신의 욕망을 타자의 욕망에 종속시킨다(상상계). 그러나 거세 콤플렉스 즉 상징계에 진입하면서 이 타자가 남근이 아닌 허상인 것을 깨닫는다. 결코 자신이 타자의 남근이 아닌 것을 알게 되면서 그는 다시 대상을 추구하고 상상계로 들어선다. 이런 변증법에 의해 대상의 추구는 거듭되고 사랑에의 욕망은 지속된다. 그러면 이때 상상계, 혹은 오이디푸스 단계는 타자가 자신의 남근 이요, 자신이 타자의 남근이 되리라고 믿는 단계이므로 은유에 해당되고 그것이 허구였음을 알게 되는 순간, 즉 상징계로 들어서 는 순간 다시 타자에 대한 욕망이 시작되므로 실재계는 환유이다. 은유와 환유로 이루어진 것, 그것은 기표요, 무의식이요, 그리고 여기에서 보듯 남근이다. 그렇다면 남근은 생물학적 기관이 아니라 기표이고 이것은 남녀 모두에게 똑같이 작용한다. 주체는 기표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도 똑같이 남근이 되고 싶고 남근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lt;BR&gt;&lt;BR&gt;남근은 보이지 않을 때만이 기능을 발휘한다. 그것은 드러나면 허상이요, 억압되면 기능을 발휘하는 진리와 같다. 스스로를 감출 때만 기능하는 진리의 모순. 남근이 보이지 않을 때, 그것이 기능을 발휘할 때가 상상계요, 그것이 제 모습을 드러내 기능을 상실하는 순간이 상징계이다. 그러므로 성욕망은 단 한 번의 성적 결합으로 영원히 종식되는 일회성이 아니다. 그것은 계속 남아 대상을 갈구한다. 따라서 남녀는 정.반의 대립관계가 아니라 영원히 흘러넘치는 '희열(jouissance)'의 관계이다. 남녀는 각기 하나(혹은 전체)가 아니고 더구나 둘이 합쳐 '하나'가 되지도 않는 넘침의 관계이다. 그래서 라캉은 여성이란 단어 앞에 정관사 를 붙였다가 지운다. 있다고 믿지만 씌어지는 순간 지워지는 상상계와 상징계의 변증법적 연결이다. '전체 혹은 하나'인줄 알았 는데 얻는 순간 넘치는 것, 즉 욕망의 또 다른 기호이기도 하다. 그것은 설명되지 않고 설명할 수도 없이 그저 경험할 수 밖에 없는 여성의 '희열'이며 진리 그 자체이다. 그래서 사유는 '희열'이다. 그리고 사랑의 편지는 진리가 허구임을 보이는 분석담론 이요, 과학적 담론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사랑의 문자, 즉 사랑의 기표이다. &lt;BR&gt;&lt;BR&gt;'왜 너는 내가 생각하는 곳에서 나를 생각해주지 않는가.' 타자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이 일치하리라고 믿는 연인은 이렇게 묻는다. 그녀의 모습 속에서도 자신의 모습만을 보는 연인. 신을 사랑하면서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요, 먼저 자신을 사랑하면서 신에게 충성을 바치기에 우리는 신에게서 또 하나의 내 모습만을 볼 뿐이다. 14세기에 유럽을 휩쓸던 궁정풍 사랑이 동성연애가 극도로 타락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나왔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궁정풍 사랑은 여성을 닿을 수 없이 높은 곳에 신처럼 위치시키고 변함없이 사랑을 바치는 이상화된 사랑이다. 라캉은 이런 식의 사랑이 유행했던 것은 남녀 사이에 성관계가 없는 것을 은폐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lt;BR&gt;&lt;BR&gt;그러나 가장 숭고하고 절대적인 듯 보이는 신에 대한 사랑도 이기적인 자기애라는 것을 깨닫고 내가 생각하는 곳에서 그녀가 생각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녀는 신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베르니니가 조각한 '성 테레사의 [희열]'은 신의 얼굴이 된다. 신비주의자들의 증언처럼 오직 경험할 뿐 설명되지 않는 것, 남근을 넘어서 희열을 향해 가는 것은 상상계를 넘어서 상징계를 경험하는 것이고 신은 주체와 대상의 정점에 위치한 거세자로서 둘이 하나됨을 막는다. 그래서 사랑의 욕망은 동廢?지속 되는 에로스로서 표시된다. 에로스가 하나가 됨을 막기 위해 프로이트도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둘 사이에 놓았다. &lt;BR&gt;&lt;BR&gt;남녀가 합쳐서 하나가 된다는 환상, 즉 주체가 상상계에 머무는 것을 거부하고 상징계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라캉의 분석담론은 남성을 남근으로 여성을 결핍으로 보는 대립적 성차별론을 극복한다. 그리고 여성의 [희열]을, 드러내면 허상이 되고마는 진리와 같은 차원으로 놓아 전통적인 남근중심주의를 넘어선다. 여성의 희열도 남근도 똑같이 기표요, 무의식이요, 스스로를 감출 때만 기능하는 진리이다. &lt;BR&gt;&lt;BR&gt;이처럼 라캉의 주체와 욕망에 관한 이론은 페미니스트이론으로서 주요한 원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문학작품의 분석에서, 시각예술의 영역에서도 이런 논리는 다르게 '반복'된다.&lt;BR&gt;&lt;BR&gt;&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자크 라캉: 무의식의 이중구조와 주체화&lt;BR&gt;&lt;BR&gt;1.머릿말&lt;BR&gt;&lt;BR&gt;프로이트로 돌아가자! 는 슬로건으로 시작했던 라캉의 새로운' 정신분석학의 결론은 프로이트에게 언어학을 선물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언어학적으로 재구성된 무의식 개념을 프로이트에게 돌려주는' 것이 바로 프로이트로 돌아가자 는 슬로건의 실제 내용이었다. 그 결과 프로이트는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 으며 언어야말로 무의식의 조건 임을 명확하게 깨닫게 되었을 것 같다.&lt;BR&gt;&lt;BR&gt;프로이트에게 언어적이고 상징적인 것에 대한 이론적 요소가 있음은 분명하다. 꿈이나 착오, 신경증에 대한 그의 분석은 대부분 언어적인 응축과 치환의 분석이며, 정신분석은 그것을 통해 증상을 야기하는 어떤 미지수( )에 접근하려 한다. 이런 점에서 상징적인 것을 개념화할 수 있는 이론적 요소를, 프로이트 이후의 작업에서 발견하여 그같은 분석을 발전시키는 것은 라캉 말대로 프로이트의 정신에 잇닿아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lt;BR&gt;&lt;BR&gt;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대상을 새로이 파악할 수 있는 어떤 개념적 요소를 추가한다는 것은 개념들의 구성과 지위, 효과에 변화를 야기할 뿐만 아니라, 대상의 정의 자체를 변형시키며, 그것을 통해 대상의 인식에서 커다란 변환을 야기한다. 이 점에서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는 라캉의 중심테제는 분명 정신분석에 대해 특정한 변화와 효과를 야기했으리라고 짐작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변화는 무엇인가? 같은 말이지만, 언어학을 정신분석에 도입하고 무의식 개념 자체를 상징적인 것으로 정의함으로써 발생하는 효과는 무엇인가? 언어학이란 새 엔진을 돌려서 정신분석이 새로이 개척한 땅은 어떠한 토양을 갖고 있는가?&lt;BR&gt;&lt;BR&gt;라캉의 이론에서 가장 빈번히 사용되며 가장 중심적인 지위를 갖는 개념들로 무의식', 타자', 주체' 등을 들 수 있다. 언어'/ 언어적 구조'나 상징적인 것' 등은 이 개념들의 구조를 정의하고 분석하는 또 하나의 축이다. 요컨대 라캉의 이론은 정신분석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무의식'과 그것을 구조화하고 있는 언어'라는 두개의 축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 두 축이 만나는 지점을 미리 얘기하자면 대문자로 시작하는 타자'l'Autre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lt;BR&gt;&lt;BR&gt;타자라는 개념은 라캉 이외에도 (프랑스의) 여러 저자들의 글에서 자주 접하는 개념인데, 예컨대 데콩브V. Descombes는 동일자와 타자란 개념을 중심으로 프랑스 현대 철학사를 정리한다.(V. Descombes, Le m me et l'Autre: Quarante-cinq ans de Philosophie Fran aise(****-****), Minuit:1979, 박성창 역, 『동일자와 타자』, 인간사랑:1990)&lt;BR&gt;&lt;BR&gt;그러나 타자l'Autre의 개념은 저자에 따라서 매우 다르게 사용된다. 특히 라캉과 푸코의 경우는 정반대로 사용된다. 푸코에게 그것은 동일자le m me와 반대되는 것으로서, 동일자가 대상들의 차이를 부정함으로써, 혹은 자신의 경계 안으로 포섭하여 '동일화'하는 것이라면, '타자'는 그것에 의해 베제되거나 억압된 것을 뜻한다. 예컨대 광기는 이성이란 '동일자'에 의해 배제되고 억압되어 침묵에 갇힌 '타자'다. 반면 라캉에게 타자란 개개인의 외부에 있는 것으로서 언어 혹은 기표의 자리요 상징계며, 주체의 타자인 무의식이다. 즉 그것은 개개의 개체가 포섭됨으로써 사회적으로 용남될 수 있는 주체--인간의 자식--이 될 수 있는 질서라는 점에서, 푸코가 말하는 동일자의 일종이다.&lt;BR&gt;. 그리고 타자로 요약되는 언어학적 무의식 개념을 통해 결국은 인간'이란 주체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개개의 생물학적 개체가 어떻게 인간세계에서 용납되는 주체'로 되는지를 연구한다.&lt;BR&gt;&lt;BR&gt;따라서 타자'와 주체'는 라캉의 새로운 사고가 집중되는 촛점이며, 라캉의 새로운 이론이 갖는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제 이하에서 우리는 타자'와 주체'에 대한 라캉의 이론을 통해 라캉의 이론이 야기한 변화와 그 의미를 추적할 것이다. 이를 위해 라캉이 『에크리』Ecrit의 「주체의 전복과 욕망의 변증법」에서&lt;BR&gt;)J. Lacan, &quot;Subversion du sujet et la dialectique du d sir dans l'inconscient freudienne&quot;, Ecrit, Seuil:1966; &quot;Subversion of Subject and the Dialectics of desire in Freudian Inconscience&quot;, Ecrit: A Selection, tr. by A. Sheridan, W.W.Norton:1977. 영역본은 A. Sheridan이 프랑스어 원본에서 일부 논문만 선별하여 편역한 것이다. 이하에서 영역본이 있는 것은 모두 영역본으로 인용하겠으며, ES로 표시하겠다. 국역은 권택영 편역, 『자크 라캉의 욕망이론』, 문예출판사:1994에 일부 번역되어 있는데, 영역본에는 없고 국역에는 있는 경우에 한해 인용할 것이며, 번역은 국역본에 따르지 않는다. 라캉 저작 이외의 다른 인용문 역시 대개는 다시 번역한 것인데, 이를 따로 언급하지는 않을 것이다.제시한 일련의 도식이 매우 유용하다고 보아, 그것을 나름대로' 해석함으로써 라캉의 이론을 요약할 것이다.&lt;BR&gt;&lt;BR&gt;2.정신분석의 대상&lt;BR&gt;정신분석의 대상은 알다시피 무의식'이다. 그런데 무의식이란 무엇인가? 무의식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가? 즉 대상으로서 무의식이 정의될 수 있는지,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정의되는지를 분명히 하는 것은 정신분석이 출발하기 위한 전제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신분석적 연구가 없다면 무의식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정의하는 것이 대체 어떻게 가능할까? 여기에는 역설이 포함되어 있다. 연구는 대상을 전제하지만, 대상은 연구를 전제한다는 역설이&lt;BR&gt;)알튀세르가 &quot;새로이 발견할 것을 나타낼 개념의 부재&quot;로 파악한 것이 이와 동일한 역설이었을 것이다.(L. Althusser, &quot;Marx und Freud&quot;, 「맑스와 프로이트에 대하여」, 윤소영 편역, 『맑스주의의 역사』, 민맥:1991) &lt;BR&gt;&lt;BR&gt;. 연구와 대상이 갖는 이러한 역설과 순환성이야말로 새로운 대상을 발견하고 새로운 연구가 시작되는데 근본적인 장애인 셈이다.사실 프로이트의 경우도 처음부터 무의식을 대상으로 연구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최면이나 신경학, 히스테리 등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기존의 심리학적 개념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징후들을 찾아냈고J. Breuer/S. Freud, Studies on Histeria,(****-****) The Standard Edition of the complete psychological works of Sigmund Freud, vol. II, Hogarth Press:1974. 이하에서 Standard Edition은 SE 뒤에 권수를 로마자 숫자로 표시한다.&lt;BR&gt;&lt;BR&gt;, 그 징후를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장치를 사고하려 했다. 무의식은 이러한 우회로를 통해서 발견'된 것이고 정의된 것이다. 따라서 무의식에 대한 정의는 물론 그것을 파악하는 위상학적topological 틀 자체가 고정되지 않고 계속 변한다. 흔히 말하듯이, 의식/무의식에서)The Interpretation of Dreams,(1900) SE:IV-V; The Psychopathology of Everyday Life,(1901) SE:VI; Three Essays od the Theory of Sexuality,(1905) SE:VII; Jokes and Their Relation to the Unconscios, (1905) SE:VIII.거시기/자아/초자아로거시기Es 등의 용어가 나타나는 것은 초기부터지만, 초자아Super-ego 등과 짝을 이루며 개념어로 사용되는 것은 후기에 와서다. 이는 특히 &quot;Beyond the Pleasure Principle&quot;, (1920) SE:XVIII과 &quot;The Ego and the Id&quot;, (1923) SE:XIV 이후 명확하게 된다.로 프로이트의 위상학이 변화되어 온 것)M. Bachtin/ V.N.Voloshinov, Freudianism: A Critical Sketch (1927), 송기한 역, 『프로이트주의』, 예문:1987 47-52쪽, 63-80쪽 참조.&lt;BR&gt;도 이런 곤란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lt;BR&gt;&lt;BR&gt;그러면 그러한 발견을 통해서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의 대상을 어떻게 정의하려고 했는가? 그는 인간의 정신이 단지 의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한다. 의식되지 않는 어떤 영역, 그렇지만 의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의식과 별세계를 이룬다고는 할 수 없는 그런 영역을 그는 무의식이라고 부른다. 한편 무의식에는, 의식되지 않으면서 의식과 사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주로 성적인 욕구와 에너지에 기인하는 어떤 힘이 있으며, 동시에 그러나 그 힘이 의식 표면에 떠오르는 것을 저지하고 억압하는 힘이 있다. 거시기'(에스Es/id)라고 불리는 전자는 쾌락원칙'에 따라 움직이고, 초자아'supre-ego라고 불리는 후자는 인간의 내면에서 사회적 질서를 대변하여 거시기의 욕구가 드러나는 것을 억압한다. 무의식 내부에 있는 이러한 갈등과 대립으로 인해 무의식은 다양한 양상으로 작용하게 된다. 자아'ego는 무의식 내의 이러한 갈등과 대립을 현실원칙'에 따라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lt;BR&gt;&lt;BR&gt;한편 라캉은 무의식을 어떤 심리적인 것이나 의식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lt;BR&gt;)J. Lacan, Ecrit: A Selection, tr. by A. Sheridan, W.W.Norton:1977, p.163(이하 ES)&lt;BR&gt;거기'에 존재하는 의미화signfying 메카니즘 (ES:165)이라고 정의한다. 그것은 의식과는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며, 의식 및 사고, 행동이 그 위에서 조직되는 기초다. 다시 말하면 의식이나 사고, 행동이 그 위에서 가능하게 되는 조건이다. 그러나 라캉은 에스'를 이드id로 번역하는데 반대한다. 에스Es는 주체subject의 약자를 뜻하는 S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이드'라고 불리는 생물학적이고 성적인 충동을 무의식의 영역에서 추방하는 것을 뜻한다. 거시기'의 짝인 초자아'의 의미도 거시기의 상실함에 따라 변화한다. 이전과 달리 그것은 더이상 '거시기'라는 어떤 충동적인 본능을 억제하는 것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여기서 자아의 운명도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자아는 대립과 갈등을 조정하고 조절하는 매개가 아니라, 개인들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착각하고 오인하는 이미지다.&lt;BR&gt;&lt;BR&gt;이런 점에서 라캉은 거시기/초자아/자아라는 후기 프로이트의 위상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에게는 의식/무의식이란 위상학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당장에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즉 무의식을 구성하는 요소, 그리고 그것들 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설명되던 무의식의 작용방식이 거시기에 대한 거부를 통해 제거되는 셈인데, 그렇다면 무의식은 대체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 또 어떻게 작동하는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라캉의 대답은 우선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으며, 상징적인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는 주장은 프로이트에게 돌아가는 라캉만의 고유한 길인 셈이며, 이런 점에서 라캉에게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테제라고 하겠다.&lt;BR&gt;&lt;BR&gt;다음으로 무의식의 형성과 작동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중심으로 욕망에 대해 새로이 정의함으로써 설명된다. 레비스트로스에게 근친상간 금지'가 인간적인 질서를 이루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전제조건이었으며, 따라서 모든 인간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규칙이었다.)C. L vi-strauss, Les Structures l mentaires de la Parent , PUF:1949, tr. by Bell et al., The Elementary Structures of Kinship, Beacon Press: 1969, 3-11쪽이는 라캉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언어의 사용과 함께 오이디푸스 기(期)는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통과해야만 하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오이디푸스적인 금지와 억압을 통해 욕망은 결핍으로서 새로이 정의되고, 이것이 무의식의 형성과 작동에서 결정적인 또 하나의 지점을 이루게 된다.&lt;BR&gt;&lt;BR&gt;요컨대 라캉에게 무의식이란 어떠한 개인이 인간의 자식'으로서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통과점에서 형성되며, 그로 하여금 인간의 질서 아래 하나의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최소한의 조건인 셈이다. 그는 생물학적 존재로서 태어난 하나의 유기체가 하나의 인간으로, 다시 말해 인간주체'로 되어가는 과정을 주목하는 것이다. 결국 라캉에 따르면 정신분석이 무의식을 대상으로 한다고 할 때, 그것은 하나의 생물체가 인간이란 이름에 걸맞는 주체로 변화됨으로써 만들어지는 결과물인 것이다. 이에 대해 알튀세르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정신분석의 대상이란 무엇인가?...인간의 분만으로부터 생겨난 조그만 생물체가 인간으로 변화한 결과들 중의 하나, 무의식이란 간단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정신분석의 대상이다.)L. Althusser, &quot;Freud et Lacan&quot;, Position: ****-****, Editions Sociales:1976, 김동수 역, 「프로이트와 라캉」, 『아미엥에서의 주장』, 솔:1991, 30쪽&lt;BR&gt;&lt;BR&gt;하지만 그것은 어떤 개인이나 주체'가 언어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라는 인간조건'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인가에 대한 연구라기보다는 차라리 이 조건들이 어떻게 개인들의 내면에 자리잡게 되는지, 그리하여 그들이 어떻게 그 조건'들 속에서 사고하고 행동하게 되는지에 대한 연구라고 하는 게 좀더 정확할 것이다. 즉 라캉은 주체와 무의식, 주체와 무의식적 질서의 관계를 설정한다기보다는 무의식과 타자, 상징적 질서 안에서 주체가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설명하려고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라캉의 이론을 주체'에 대한 이론, 하나의 개체가 주체화'하는 과정에 대한 이론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E. Balibar, &quot;Discussion&quot;, Lacan avec les Philosophies, Bibliotheque du Coll ge Internationale de Philosophie, Albin Michel:1991, 윤소영 역, 「라캉과 철학: 주체성과 상징성이라는 쟁점」, 『이론』 10호, 1994년 겨울, 198쪽&lt;BR&gt;.&lt;BR&gt;잠정적으로 비교한다면 라캉에게 무의식이란 인간적 주체를 만들어내는 상징적 질서의 메카니즘이며, 주체로서 사고하고 표상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지반이요 조건(이런 의미에서 의식'이 아니라 의식의 전제조건이고 무의식'이다)이다. 한편 이와 달리 프로이트에게 무의식이란 단지 질서의 메카니즘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것은 차라리 무질서한 충동과 그것을 통제하려는 질서의 갈등과 대립이 이루어지는 장이며, 이런 이유에서 의식의 표면 아래로 억압되어 진행되는 과정이다(이런 의미에서 무의식'이 의식'이 아닌 것으로 정의되는 이유도 다르다). 또한 라캉에게 무의식은 생물학적인 요소를 배제한 채 상징적인 것으로서 정의되지만, 프로이트가 보기에는 차라리 생물학적이고 성적인 에너지가 좀더 근원적이고 일차적인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결국 라캉은 언어학이란 우체국을 경유하여 정신분석을 프로이트에게 되돌려 준 셈이다. 그런데 그걸 받아본 프로이트가 그것이 본래 자기가 보낸 우편물이었다고 생각할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을 것 같다. 물론 그게 라캉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겠지만. 그리고 우리에게도 결코 중심적인 문제는 아니지만.--왜냐하면 '되돌려준다'는 것은 언제나 그러기 마련이기 때문이다.&lt;BR&gt;&lt;BR&gt;3.언어와 무의식&lt;BR&gt;&lt;BR&gt;(1)기표의 물질성&lt;BR&gt;라캉의 이론에서 가장 중심적인 것은 알다시피 무의식이 언어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정신분석의 경험이 무의식 속에서 발견해낸 것은 언어의 구조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진실의 모든 효과는 정신과 아무 상관없이 문자에 의해서 생겨난다. 이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정신의 허세가 사라지게 되었다. 에컨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 이르면 모든 쪽에서 문자에 관한 언급이 나오며, 담론이나 텍스트 구조 속에서 또는 관용어법 속에서 문자가 차지하는 위치가 거론되고 있다고 한다.소쉬르가 분명히 한 것처럼, 언어의 구조는 그것을 사용하는 어떤 개인과도 무관하게 사회적 규약으로서, 객관적 구조로서 존재한다.)F. de Saussure, Cours de Linguistique G n ral, Ed. par Ch. Bally et A. Sechehaye, 최승언 역, 『일반언어학 강의』, 민음사:1990, 20-26쪽.&lt;BR&gt;&lt;BR&gt;다시 말해 언어적인 기호가 특정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기호들 간의 관계에 의해서, 기호들을 조직해내는 고유한 규칙에 의해서며, 이러한 규칙을 우리는 흔히 언어구조라고 부른다. 여기서 언어가 발화주체에게 봉사하는 다양한 심리적, 육체적 기능과 혼동되어선 안된다. 왜냐하면 언어와 그 구조는 각각의 주체가 그 정신적 발전에서 언어를 습득하는 순간보다 앞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ES:148)언어를 사용하려는 어떠한 개인도 그 기호들이 조직되는 그 규칙 속으로 들어가야 하며, 그 규칙이 정하는 바에 따라 사용해야 한다. 기호의 의미 역시 마찬가지로 그것을 사용하려는 사람의 의도가 아니라 언어적인 규칙들에 의해 정의된다. 따라서 발화하는 주체는 언어의 노예로 나타나고, 나아가 주체는 그 자신의 고유한 이름(기표)을 통해서만 자신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 는 점에서(ES:148) 기표를 조직해내는 언어구조에 종속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lt;BR&gt;&lt;BR&gt;이를 달리 말한다면 인간이 언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는 한 언어적인 구조에, 즉 기표를 조직해내는 규칙에 종속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고, 기표들은 주체를 복속시키는 물질적 힘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기표들의 구조가 주체에 대해서 갖는 이러한 물질적 힘을 그는 기표의 물질성'이라고 부른다. 이런 의미에서 라캉은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나를 통해 행해지고 있다 고 말한다. 유의할 것은 여기서 물질성'이란 말이 실증주의적인 실체를 지시하는 게 아니라, 개인의 주관적인 어떤 관념들과 달리 다양한 개인들에 대해 기표의 구조가 갖는 강제성과 구속성을 뜻한다는 점이다.)이런 점에서 이는 뒤르켐이 말하는 사회적 사실'이란 개념과 유사하다. 이는 아마도 소쉬르의 구조주의 자체가 뒤르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이 레비스트로스나 라캉을 포함하여, 표상체계조차도 강제성과 구속성을 갖는 객관적인 어떤 것으로 보는 프랑스적 전통과 밀접하게 잇닿아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유사성을 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듀스P. Dews는 뒤르켐의 집합표상'repr sentation collective이 레비스트로스 이래 프랑스 사상가들의 이론적 전통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지적한다(P. Dews, Logic of Disintegration, Verso:1987, 3쪽). 이는 바슐라르G. Bachelard나 캉길렘G. Canguilheim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까지 말한다(같은 책, 244쪽).&lt;BR&gt;&lt;BR&gt;&lt;BR&gt;라캉 말대로 무의식이 언어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고 한다면, 이제 무의식에 대한 연구 역시 무의식의 기호들이 조직되는 규칙에 대한 언어학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라캉이 소쉬르와 야콥슨의 언어학이론을 정신분석에 끌어들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는 담론의 영역에서 사용되는 언어적 규칙과 무의식의 영역에서 사용되는 언어적 규칙의 차이는 재현가능성'Darstellbarkeit에 대한 고려를 제외하고는 없다고 한다(ES:160-1).&lt;BR&gt;따라서 기호가 부재하는 어떤 대상을 대신하여 표상하는 것처럼 무의식에서 증상이나 꿈은 직접적으로는 현전하지 않는 어떤 것의 현전이며, 언어와 담론에서 은유와 환유가 표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기호들이 조직되는 방식인 것처럼, 무의식에서 은유와 환유 역시 증상이나 꿈이 조직되는 기본적인 방식이다. 또한 기호의 의미는 기표들 간 차이에 의해서 구별되고, 그 기표들의 결합을 통해 정해지듯이, 증상이나 꿈의 의미 역시 마찬가지 방식으로 정해진다.결국 라캉은 언어야말로 무의식의 조건 이라고 한다.)J. Lacan, &quot;Preface by Jacques Lacan&quot;, A. Lemaire, Jacques Lacan, (1970) tr. by d. Macey, Routledge &amp;amp; Kegan Paul:1977, 이미선 역, 『자크 라캉』, 문예출판사:1994, 20-1쪽&lt;BR&gt;&lt;BR&gt;언어가 없다면 무의식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언어를 통해서 무의식이 만들어지고 작동하게 됨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이는 라캉의 무의식 개념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통로며, 타자와 주체의 개념에 이르는 중심적인 테제기도 하다.&lt;BR&gt;(2)기표의 고정점라캉은 기표(S)와 기의(s)가 서로 다른 차원의 세계를 이룬다고 본다. S/s에서 바bar는 이 양자를 가르는 구분선이며 기표가 기의에 이르는 것에 저항하는 저항선이라고 한다.)소쉬르는 기표의 자의성'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기표와 기의 간의 관계는 자의적이란 것이다(소쉬르, 『일반언 &lt;/FONT&gt;&lt;/P&gt;&lt;div class='scrap_memo'&gt;&lt;span&gt;&lt;b&gt;출처&lt;/b&gt; : 상담심리자료창고&lt;span&gt;&lt;/div&gt;&lt;div class='scrap_memo'&gt;&lt;span&gt;&lt;b&gt;글쓴이&lt;/b&gt; : 고바우 &lt;span&gt;&lt;a href=&quot;http://cafe.daum.net/_service/bbs_read?grpid=1Dnuu&amp;fldid=1Vdg&amp;contentval=00013zzzzzzzzzzzzzzzzzzzzzzzzz&quot; class=&quot;d_4F72B3 under&quot; target=&quot;_blank&quot;&gt;원글보기&lt;/a&gt;&lt;/div&gt;&lt;div class='scrap_memo'&gt;&lt;span&gt;&lt;b&gt;메모&lt;/b&gt; :  &lt;span&gt;&lt;/div&gt;</description>
      <category>쇼핑리스트</category>
      <author>비너스매화</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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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9 Jul 2011 09:33:0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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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인문학적 상상력이 필요하다</title>
      <link>https://gykang2.tistory.com/112</link>
      <description>&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지난 30년을 되돌아보면 우리사회가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단번에 알 수 있다. 특히 눈에 띄는 변화는 물질적 욕망의 무한 성장이다. 당장 30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 삶의 관건은 먹고 사는 문제였다. 그 대신 인간 삶의 많은 가치들, 정의, 자유, 평등, 민주주의 등은 배제되어야 했다. 사회 전반적으로 성장의 파이를 키우자는데 대한 묵시적 동의가 있었다. 그 공간에서는 침묵과 복종 그리고 피와 땀이 중요했고, 그 중심에는 우리 지역이 있었다. 그렇게 탈취한 권력과 자본은 지역의 자부심이었고 자랑이었다. 훗날 이것이 결국에는 우리 지역을 옭아매는 주홍글씨가 될 줄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민주화를 총칼로 짓밟은 새로운 권위주의의 등장과 뒤이은 지역 권력의 패권화는 지역의 변화와 개인의 성장을 또다시 차단했고, 자부심과 자랑의 허세 병을 연장시켰다. 그 사이 지역의 병은 깊어갔고, 자만심을 넘어 똥고집으로 악화되었다. 지금은 알 수 없는 각종 질병들에 노출된 치유불가능한 상황이 된 듯 하다. 남은 건 조절 없는 욕망을 추구하는 강한 성장주의의 피폐한 아우성뿐이다. 그 과정에서 또다시 ‘지역민의 피와 땀’을 요구하는 무도한 성명서와 글들이 지역 언론을 도배하고 있다. 정말이지 인간에 대한 근본적으로 예의가 없는 태도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피와 땀인가?&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지역의 새로운 삶의 방향을 외치는 작은 주장들은 있으나 거의 들리지 않는다. 여전히 성장과 개발만이 살길임을 지역을 뒤덮은 ‘밀양 신공항’ 현수막에서 그리고 ‘과학벨트’ 나누어먹기 담론에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한계를 모르는 물질에 포획된 정신은 이성적 통제력을 상실해 버렸다. 중앙에서는 지역의 내부 분열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중앙의 이토록 완고한 중앙주의 실현은 지난 30년간 누려온 우리 지역의 자부심과 자랑의 결과가 아닐까.&amp;nbsp;&lt;/SPAN&gt;&lt;BR&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 color=#3366ff&gt;&lt;STRONG style=&quot;LETTER-SPACING: 0px&quot;&gt;전공 근본주의, 학문의 위기 자초한 대학&lt;/STRONG&gt;&lt;/FONT&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정신과 물질이 제 갈 길을 잃어버린 이 지점에서 필자는 ｢계명대학교 목요철학원｣이 제시한 아주 작은 변화에 주목한다. ｢계명대학교 목요철학원｣이 ｢목요철학세미나｣로 처음 출발한 날은 1980년 10월 8일이다. 참으로 어둡고 힘든 시기였다. 정치적 권위주의와 경제적 개발주의가 우리사회를 주도하던 시절이다. 빵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내팽개쳤던 시절이다. 그런 시절에 한 대학의 학과에서 권위적이고 고답적인 대학의 환경에 새로운 생각이 가능한 열린 공간을 마련했던 것이다. 각자의 주장이 없었던 그 암울한 시절에 각자의 주의와 주장을 가능하게 했던 공간으로 마련되었던 것이 바로 ｢목요철학세미나｣였다.&amp;nbsp;&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지난 30여 년간 국내외 여러 석학 및 연사들의 강연과 수많은 청중의 열띤 토론이 함께 어우러진 이 목요일의 ‘향연’은 ‘우리시대의 금자탑’이라는 수사를 얻기도 했다.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흥분하고 분노하며 시대를 고민하는 모든 젊음의 지적 욕구들이 분출되고 용해되는 열린 공간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amp;nbsp;&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대학과 사회의 경계가 무너진 오늘날 대학의 공간은 이미 개방성을 상실한 채 전공 근본주의에 빠져 스스로 학문의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 ｢목요철학세미나｣가 ｢계명대학교 목요철학원｣이라는 이름으로 대학을 벗어나 사회로 나온 이유다.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는 이 거칠고 야만적인 시대에 인문학을 들고 지역 시민을 향한 걸음을 내딛었다.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지역 시민 모두를 이 열린 공간으로 초대하고자 한다. 거기에는 거창한 구호도 거대한 담론도 없다. 패션과 첨단의료복합보다는 오히려 교육과 문화의 도시를 먼저 생각한다. 새로운 정신문화의 기틀을 마련해 갈등과 반목으로 들떠 있는 사람과 세상을 치유하고자 한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지금 우리사회의 모습은 잠깐 눈을 돌려 보면 알 수 있다. 각자가 자기의 주장만 내세우지 너의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거칠어져 있다. 인간은 사람 인(人)과 사이 간(間)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관계 맺기’를 통해서 존재한다. ‘관계와 관계’ 사이에는 모여서 하나의 덩어리를 만들기 위한 ‘결’이 생겨난다. 그런데 이 결은 올바른 교육이 없을 때 거칠어진다. 다시 만나지 않을 생각이 드는 사람에 대해 때때로 가지게 되는 무례와 무심함이 거친 ‘결’의 한 형태이다. 올바른 교육이 사라진 무제한적 욕망과 무한 경쟁의 승자독식 사회가 남긴 결은 타자에 대한 무례와 무심함이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lt;/SPAN&gt;&lt;BR&gt;&lt;BR&gt;&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 color=#3366ff&gt;&lt;STRONG style=&quot;LETTER-SPACING: 0px&quot;&gt;인문학적 상상력이 부(富)가 되는 시대를&lt;/STRONG&gt;&lt;/FONT&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힘들겠지만 우리의 본래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것은 인간의 근본인 인문학으로 돌아가는데 있다. 인문학을 공부하고 학습하면 사람 사이의 결을 부드럽게 할 수 있다. 공부를 통해 알게 되고, 학습을 통해 그 자극을 상시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학습(學習)이 중요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머리로 아는 것을 가슴으로 숙성시키고 마침내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 학습이다. 따라서 인문학이 가지는 개인적 차원의 의미는 나와 관계 맺고 있는 너와 우리(사회)의 결을 부드럽게 만드는 학문이 될 것이다.&amp;nbsp;&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자연과 자연,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의 대립과 갈등을 조장하는 성장이 아니라 인문학적 상상력이 부(富)가 되는 시대를 만들어야 한다. 인문학적 상상력은 미래의 지식기반 사회가 심화될수록 더 핵심적 기능을 갖게 될 것이다. 미래는 인문학적 성찰이 예전의 토지나 자본처럼 빈부를 가르는 기반이 될지도 모른다. 인문학적 상상력이야말로 협동보다는 경쟁, 전체보다는 부분, 유기체보다는 기계, 의미보다는 사실, 관계보다는 개체, 변화보다는 불변, 유기체적 불확실성보다는 기계적 확실성을 선호하는 우리들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인문학적 상상력은 시대를 읽고 미래를 준비한다. 인문학은 과거의 역사를 들추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말하며 윤리를 이야기한다. 인문학의 주체인 인간의 의식은 니체의 말처럼 유기체에서 가장 뒤늦게 발전된 것이며, 따라서 가장 미완성이고 가장 무력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의식적 기능은 충분히 교육되어 성숙하기 전까지는 유기체에 위험하다. 의식적 인간에게 인문학 교육이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시대를 반성하고 나 자신을 되돌아볼 성숙의 기회를 주기 때문이지 문제에 대한 새롭고 탁월한 해법을 제공해 주기 때문은 아니다.&amp;nbsp;&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인문학의 근본적 가치는 공공성에 있다. 여기저기서 인문학을 말하고 ‘인문학의 열풍’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인문학은 결코 시장과 자본에 의해 충분히 뒷받침될 수 있는 학문이 아니다. 인문학의 효능과 질감은 인간들 사이의, 문화들 사이의, 텍스트들 사이의, 작품들 사이의, 현재와 과거 사이의, 현존하는 것과 현존하지 않는 것 사이의, 자연과학적으로는 검증되지 않는 이해와 소통을 확장하고 심화시켜, 야만스러운 불화를 줄이고 인간의 자기이해와 인간적 삶의 이념들을 형성해 나가는 것에서 확인될 수 있다.&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평화신문-이재성칼럼&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SPAN&gt;&lt;BR&gt;&lt;/P&gt;</description>
      <category>쇼핑리스트</category>
      <author>비너스매화</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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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13 Jul 2011 09:40:19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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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블로그 소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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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h3&gt;제목을 입력해주세요&lt;/h3&gt;&lt;blockquote&gt;&lt;p&gt;내용을 입력해주세요&lt;/p&gt;&lt;/blockquote&gt;</description>
      <author>비너스매화</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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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25 Jun 2011 01:46:2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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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가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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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class=tx-daum-image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hspace=1 src=&quot;https://t1.daumcdn.net/cfile/cafe/1234AF0E4AED19DC78&quot; width=640 vspace=1 border=0 actualwidth=&quot;640&quot;&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lt;바쁜 가을볕을 온종일 쬐는 사과밭&amp;gt; &lt;/P&gt;
&lt;P&gt;&amp;nbsp;&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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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gt;&amp;nbsp;&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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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스토리1</category>
      <author>비너스매화</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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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9 Nov 2009 02:09:27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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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스크랩] 시와 연애하는 법 4 - 안도현</title>
      <link>https://gykang2.tistory.com/51</link>
      <description>&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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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 class=headtitle01 colSpan=2&gt;&lt;STRONG&gt;익숙하면 의심하라…낯선 진실 드러난다&lt;/STRONG&gt;&lt;/TD&gt;&lt;/TR&gt;
&lt;TR&gt;
&lt;TD class=subtitle01 style=&quot;VERTICAL-ALIGN: top&quot; colSpan=2&gt;상투성은 상상력을 마비시키는 ‘시의 적’&lt;BR&gt;‘토끼는 ()뛰어간다’ 어떤 말을 넣을 것인가&lt;BR&gt;늘 보면서도 사실은 보지 못하는 것 찾아야&lt;/TD&gt;&lt;/T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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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 class=movie_text style=&quot;WORD-BREAK: break-all&quot; bgColor=#8f8f8f&gt;&amp;raquo; 익숙하면 의심하라…낯선 진실 드러난다&lt;/TD&gt;&lt;/T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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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align=justify&gt;&lt;FONT size=4&gt;&lt;B&gt;4. 익숙하고 편한 것들과의 결별&lt;/B&gt;&lt;/FON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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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align=justify&gt;만약에 당신이 ‘가을’을 소재로 한 편의 시를 쓴다고 치자. 당신의 머릿속에 당장 무엇이 떠오르는가? 아마도 가을의 목록은 십중팔구 ‘낙엽·코스모스·귀뚜라미·단풍잎·하늘·황금들녘·허수아비·추석’과 같은 말들일 것이다. 이런 말들이 당신의 상상력을 만나기 위해 머릿속을 왔다 갔다 할 것이다. 
&lt;P align=justify&gt;그러다가 낙엽은 ‘떨어진다’는 말로 연결되고, 코스모스는 ‘한들한들’이라는 의태어를 만나고, 귀뚜라미는 ‘귀뚤귀뚤’이라는 의성어와 결합하며, 단풍잎은 ‘빨갛게’ 물이 들 것이며, 하늘은 ‘푸른 물감을 뿌리다’는 문장과 조우하며, 황금들녘은 풍요의 이미지를 데리고 올 것이며, 허수아비는 반드시 ‘참새’를 불러들이고, 추석은 ‘보름달’로 귀결될 것이다. 
&lt;P align=justify&gt;이렇게 한심한 조합으로 시의 틀을 짜려고 한다면 그 순간, 그때부터 당신의 시는 망했다고 보면 된다. 발버둥을 쳐도 소용없다. 당신의 시는 상투성의 그물에 스스로 갇힌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상투성은 시의 가장 큰 적이다. 그것은 대상을 피상적으로 인식하면서 생기는 마음의 독버섯과 같다. 겉은 멀쩡한데 우리의 상상력을 마비시키는 독을 품고 있는 것이다. 
&lt;P align=justify&gt;“기계적인 우리들의 삶 속에 파묻혀 있는 세계를 관찰하고 느끼고 그것을 언어로 드러내는 일”을 오규원은 &amp;lt;현대시작법&amp;gt;에서 ‘미적 인식’이라는 말로 명쾌하게 정리한 바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소재라고 하더라도 시인의 미적 인식에 의해 재발견되지 않으면 그것은 시라고 할 수가 없으며 죽은 인식의 되풀이에 불과하다. 죽은 인식은 죽은 언어를 불러온다. 시인의 가장 큰 임무 중의 하나는 죽은 언어를 구별하여 과감히 버리고 살아 있는 언어와 사투를 벌이는 일이다. 
&lt;P align=justify&gt;&lt;!--ⓘ AD kisa banner include 시작--&gt;&lt;BR clear=all&gt;
&lt;IFRAME marginWidth=0 marginHeight=0 src=&quot;http://www.hani.co.kr/section-adv/713/culuter_590130_Middle2.html&quot; frameBorder=0 noResize width=590 scrolling=no height=130&gt;&lt;/IFRAME&gt;&lt;BR&gt;&lt;!--ⓘ AD kisa banner include 끝--&gt;&lt;BR&gt;연탄 이야기를 잠시 하자. 언제부터인가 내 이름 앞에 슬그머니 ‘연탄시인’이라는 말이 붙어 다니는 것을 보았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 ‘나무 시인’이나 ‘풀잎 시인’이 아니고 하고많은 소재 중에 왜 하필이면 연탄이란 말인가. 
&lt;P align=justify&gt;“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lt;P align=justify&gt;아마도 &amp;lt;너에게 묻는다&amp;gt;를 비롯해서 연탄을 소재로 몇 편의 시를 쓴 탓일 게다. 애초에 나는 연탄을 소재로 타인에 대한 사랑이나 희생을 쓰려고 했던 게 아니다. 나는 연탄을 내세워 ‘가을’에 대해 쓰고 싶었다. 아니, ‘가을’을 쓰려고(‘가을’을 내 방식으로 인식하려고) 연탄을 끌어들였다는 말이 맞겠다. 옛날에는 여름의 뜨거운 기운이 꺾일 때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연탄이었다. 연탄을 실은 트럭과 리어카가 거리와 골목을 누비기 시작하는 때가 바로 가을이었다. 
&lt;P align=justify&gt;어릴 적에 내 자취방 부엌에는 늘 연탄이 있었다. 낯선 도시에서 내가 처음 배운 것은 자취방의 연탄불을 꺼뜨리지 않고 제때 갈아주는 일이었다. 연탄의 붉고 푸른 불꽃이 혀를 날름거리며 구들장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나는 자주 바라보았다. 그 불꽃으로 밥과 국과 라면을 끓였고(몇 번이나 라면 냄비를 뒤엎었고), 양말과 운동화를 말렸고, 양은찜통에다 밤새 물을 데워 아침에 머리를 감았다. 불을 꺼뜨리지 않으려고 자다가 벌떡 일어나 연탄을 갈았고, 연탄구멍을 정확하게 맞추려고 잠이 가득 찬 눈을 비볐고, 그리고 연탄가스를 맡지 않으려고 몇 초 동안은 숨을 참아야 했다. 
&lt;P align=justify&gt;&lt;BR clear=all&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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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 noWrap colSpan=3&gt;&lt;!-- Padding - Height --&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언덕 위에 있던 그 자취방을 나와 학교로 가려면 가파른 길을 내려가야 했다. 겨울이면 눈 녹은 물이 비탈길을 빙판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그런 아침에는 누군가 어김없이 비탈길에 연탄재를 잘게 부수어 뿌려놓곤 했다. 그 고마운 분이 누구인지는 지금도 모르지만 이 세상에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일찍 일어나는 분이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lt;P align=justify&gt;그러니까 연탄은 내게 두 가지의 의미를 한꺼번에 선물했다. 하나는 가을이라는 계절을 인식하는 소재로, 또 하나는 타인과의 관계를 성찰하는 상징으로 나에게 온 것이다. 
&lt;P align=justify&gt;타인에 대한 사랑과 희생의 이미지는 오히려 연탄보다 ‘촛불’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촛불이 연탄보다 더 시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또한 상투성에 굴복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신석정을 비롯해 이미 많은 시인들이 촛불의 자기희생을 노래했다. 지금 와서 그것을 굳이 시라는 형식에 담아야 할 그 어떤 이유도 없다. 상투적인 동어반복만큼 비시적인 것도 없는 것이다(단 2008년 6월, 지금, 이 땅의 광장에서 켜지는 수많은 촛불은 또 다른 의미규정과 표현방식이 필요하다). 
&lt;P align=justify&gt;초등학생들에게 동시를 가르치는 교실에서도 문제는 수없이 발견된다. 2학년 1학기 &amp;lt;쓰기&amp;gt; 교과서에는 말의 재미를 느끼게 하기 위해 반복되는 말이나 흉내 내는 말을 써보라고 하는 단원이 있다. 당신 같으면 다음 괄호 안에 어떤 말을 넣을 것인가? 
&lt;P align=justify&gt;‘토끼는 ( )뛰어간다.’ 
&lt;P align=justify&gt;물론 정답은 ‘깡충깡충’이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 중에 과연 토끼가 깡충깡충 산을 뛰어오르는 모습을 본 아이가 몇이나 될까. 아이들은 대부분 동물원이나 토끼장에서 ‘엉금엉금’ 기어가는 토끼를 본 게 전부일 것이다. 이런 기계적인 동시교육은 ‘시냇물은 졸졸졸’ ‘새싹은 파릇파릇’ ‘흰 눈은 소복소복’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시라는, 매우 잘못된 생각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 표현의 경직성은 사고의 경직성으로 옮아간다. 아이들의 말랑말랑한 머리를 딱딱하게 만드는 이런 나쁜 동시 교육을 이제는 한시바삐 집어치워야 한다. 
&lt;P align=justify&gt;“미(美)는 언제나 엉뚱하다”고 한 보들레르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당신이 다다르고자 하는 미적 인식을 위해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낯설게 하기’라는 개념을 창작의 신조로 삼으라. 시인 이문재는 문학청년 시절 &amp;lt;문학개론&amp;gt; 첫 시간에 노교수가 “문학은 인생이다”라는 문장을 칠판에 쓰는 걸 보고 강의실을 뛰쳐나가고 싶었다고 한다. 
&lt;P align=justify&gt;“스무 살 봄날, 나에게 문학은 인생 그 이상이어야 했다. 문학은 인생의 멱살을 휘어잡거나, 인생과 무관한 강렬한 빛이거나 독약 같은 것이어야 했다. 나는 강의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류시화와 어울리며, 고전음악 감상실을 찾았고, 대학로에 죽쳤다. 캠퍼스와 강의는 고루하고 지루했다. 우리에게는 파격이 필요했다. 고정관념과 선입견, 관습과 제도를 뛰어넘는 파천황이 절실했다. 우리는 수업시간에 벌떡 일어나 노래를 불렀고, 본관 앞에서 막걸리에 도시락을 말아먹었다. 글씨를 왼손으로 썼고, 담뱃갑을 거꾸로 뜯었다.” 
&lt;P align=justify&gt;이런 행위를 단순히 문학청년의 치기로 볼 수만은 없다. ‘시적인 것’을 찾으려는 탐색의 정신은 혼돈과 암흑을 깨뜨리는 파천황의 정신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니 당신이 늘 보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라. 소소한 것에서부터 삶의 기미를 포착하고 파악하는 습관을 길러라. 사물을 반듯하게 보지 말고 거꾸로 보라. 세상을 걸어 다니면서 보지 말고 때로는 물구나무를 서서 바라보라. 지금부터는 진실이라고 믿고 있던 것들을 의심하고, 아름답다고 여기던 것들과 끊임없이 싸우고, 익숙하고 편한 것들과는 결별을 선언하라. 
&lt;P align=justify&gt;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한 순간도 미적 인식에 다다를 수 없게 된다. 명나라 말기의 사상가 이지(李贄, 1527~1602)는 ‘동심설’에서 진정한 인간의 모습은 어린아이의 마음에 있다고 말한다. 동심이야말로 ‘시적인 것’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lt;P align=justify&gt;&lt;BR clear=all&gt;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290 align=right border=0&gt;
&lt;TBODY&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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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IMG src=&quot;http://img.hani.co.kr/imgdb/resize/2008/0531/01298109_20080531.jpg&quot; border=0&gt; &lt;/TD&gt;&lt;/T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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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 height=3&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 사진설명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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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 class=movie_text bgColor=#8f8f8f&gt;&amp;raquo; 안도현의 시와 연애하는 법&lt;/TD&gt;&lt;/TR&gt;
&lt;TR&gt;
&lt;TD height=3&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사진설명 --&gt;&lt;/TD&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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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 noWrap colSpan=3&gt;&lt;!-- Padding - Height --&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어린아이는 사람의 처음 모습이요, 동심은 마음의 처음 모습이다. 그런데 동심은 왜 느닷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도리(道理)와 견문(見聞)이 들어와 내면에서 주인 노릇을 하게 되면서 동심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나아가 도리와 견문이 나날이 더욱 쌓이게 되면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이 날마다 더 그 폭이 넓어져서, 이에 아름다운 이름이 좋아할 만한 것임을 알게 되어 애써 이름을 드날리고자 하여 동심을 잃게 되고, 아름답지 않은 이름이 추함을 알아 애써 이를 덮어 가리려고 하여 또 동심을 잃게 된다.” 
&lt;P align=justify&gt;여기에서 도리와 견문은 고정관념, 구태의연한 사고, 인습적 가치관 따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학문과 사상의 영역뿐만 아니라 시의 영역에서도 진정성은 동심을 회복하는 데서 그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상투적인 눈, 관습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식, 진부한 언어로는 진정성의 끄트머리도 붙잡을 수가 없다. 새로운 것과 참된 것은 어린아이의 눈 속에 있다. 
&lt;P align=justify&gt;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lt;P align=justify&gt;
&lt;P align=justify&gt;&lt;!-- ##### news BOX st. #####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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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 style=&quot;PADDING-RIGHT: 4px; PADDING-LEFT: 4px; PADDING-BOTTOM: 4px; PADDING-TOP: 4px&quot; bgColor=#e7e7e2&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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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BODY&gt;
&lt;TR&gt;
&lt;TD class=news_text02&gt;
&lt;P align=justify&gt;&lt;FONT color=#638f03&gt;&lt;B&gt;☞ ‘낯설게 하기’&lt;/B&gt;&lt;/FONT&gt; 
&lt;P align=justify&gt;쉬클롭스키 등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에 의해 처음 사용된 용어. 관습적인 인식을 벗어나 사물을 낯설게 봄으로써 그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자 한다. 기존의 발상이나 언어 표현기법을 뛰어넘어 참신한 충격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시에서는 시어와 일상적 언어의 차이를 규명함으로써 발상의 전환을 꾀하는 것 따위가 이에 해당한다.&lt;/P&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
&lt;TR&gt;
&lt;TD height=23&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
&lt;P align=justify&gt;&lt;!-- ##### news BOX fin. ##### --&gt;
&lt;P align=justify&gt;&lt;BR&gt;&lt;!-- 기획연재 --&gt;&lt;/P&gt;&lt;/DIV&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P&gt;&lt;div class='scrap_memo'&gt;&lt;span&gt;&lt;b&gt;출처&lt;/b&gt; : 시와 연애하는 법 4 - 안도현&lt;span&gt;&lt;/div&gt;&lt;div class='scrap_memo'&gt;&lt;span&gt;&lt;b&gt;글쓴이&lt;/b&gt; : 전향 &lt;span&gt;&lt;a href=&quot;http://cafe.daum.net/_service/bbs_read?grpid=Awi&amp;fldid=1jnF&amp;contentval=0007Lzzzzzzzzzzzzzzzzzzzzzzzzz&quot; class=&quot;d_4F72B3 under&quot; target=&quot;_blank&quot;&gt;원글보기&lt;/a&gt;&lt;/div&gt;&lt;div class='scrap_memo'&gt;&lt;span&gt;&lt;b&gt;메모&lt;/b&gt; :  &lt;span&gt;&lt;/div&gt;</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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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비너스매화</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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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3 Aug 2009 18:25:1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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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시써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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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문성민
&lt;P&gt;&lt;FONT size=4&gt;시써라 &lt;BR&gt;뭘써요?&lt;BR&gt;시 쓰라고.&lt;BR&gt;뭘 써요?&lt;BR&gt;시 써서 내라고!&lt;BR&gt;내.&lt;BR&gt;제목을 뭘 써요?&lt;BR&gt;니 맘대로 해야지.&lt;BR&gt;뭘 쓰라고요?&lt;BR&gt;니 맘대로 쓰라고.&lt;BR&gt;뭘 쓰라고요?&lt;BR&gt;1번만 더하면 죽는다.&lt;BR&gt;뭘 쓰라고요?&lt;BR&gt;이 녀석아!&lt;BR&gt;장난하냐!&lt;/FONT&gt;&lt;/P&gt;&lt;BR&gt;</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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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4 Jan 2009 16:55:27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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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아이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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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19 May 2008 10:32:21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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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고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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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비너스매화</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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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1 Mar 2008 19:37:5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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